『大東武-重生歷程』을 통해 본 합기도와 아이키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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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武-重生歷程』을 통해 본 합기도와 아이키도의 관계

합기도신문에서는 한문 ‘合氣道’를 쓰고 한국과 일본의 한자 발음에 따라 다르게 불리고 있는 합기도와 아이키도(한국 합기도와 구분하기 위해 아이키도로 표기함)의 명칭 문제와 종주국 그리고 역사적 뿌리에 대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취재와 인터뷰를 진행 중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일본에서 대동류 유술을 배우고 와서 합기도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최용술 선생의 전기를 쓴 한풀의 창시자 김정윤 씨를 인터뷰하고자 했으나, 그는 인터뷰를 사양하며 최용술 선생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 『대동무-중생역정(2010, ᄇᆞᆰ터)』에 모두 밝혀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김정윤 씨와의 인터뷰 대신 『대동무』에 기술된 내용에 서술된 최용술 선생의 생애와 일본 아이키도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과의 관계, 명칭 문제 등을 요약, 발췌해 실어보기로 했다.

이 책은 최용술 선생의 구술과 김정윤 선생이 일본에 8번 답사한 내용 등을 정리한 것이다.(편의상 본문의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는 최용술로, 미나모토 마사요시(原正義)는 다케다 소가쿠로, 대동무(大東武)는 대동류(大東流)로 바꿨다)

 

최용술 선생의 생애

최용술 선생은 1899년 7월 20일에 충북 영동군에서 태어났고 1986년 타계했다.
어렸을 적 이름은 범룡이었는데 최사연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두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이후 아버지와 큰 형까지 모두 사망하면서 천애고아가 된 그는 친척들을 찾아 길을 헤매다 대구 역에서 빵집을 하는 일본인 노부부의 눈에 띄어 양자가 되고 아홉 살 때 그들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다.

(편집자주;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최용술 선생의 구술에 의하면 다케다 소가쿠의 양자로 있었다고 하나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일부에서는 다케다 소가쿠를 북해도로 초청한 요시다 고타로 기자의 집에서 시종을 들던 조선 아이가 있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보여진다. 최용술 선생의 일본 이름은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이다. 따라서 다케다 소가쿠의 양자였다고 말은 꾸며낸 얘기인지는 아직까지 확인할 길이 없다.)

종전이 되고나서 대구에 정착한 최용술 선생은 어렸을 적 양부모에게 배웠던 빵 만드는 기술로 풀빵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렸다.
최용술 선생은 딸에게 자신이 배운 호신술 몇 가지를 가르친 후 풀빵 먹으러 온 학생들에게 자기 딸을 이기면 빵을 덤으로 주겠다고 했다. 이에 여자라고 얕보고 덤벼들었다가 큰 코 다친 학생들이 문하생으로 몰려들면서 집 옆 창고를 빌려 조그마한 체육관을 만든 게 이 땅에서 처음 연 대동류 수련장이었다.

이후 달성공원 근처에서 양조장을 하고 있던 서복섭 씨와 인연이 닿아 양조장 2층에 간판을 ‘대한합기도유권술도장’ 이라 간판을 내걸고 두 번째 도장을 열었는데 1952년의 일이다. 이때 도장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최용술 선생이 대동류를 처음 가르칠 때는 관절기와 권술, 각술을 주로 가르쳤다고 한다.

휴전 후 1954년에는 계산동으로 이사를 해 세 번째 도장을 열었고 1959년 여름에는 북성로 2가에 독립 도장을 개설했다. 이때를 계기로 수련이 개방되고 기술체계도 일원화되었다.
1962년 최용술 선생의 역사와 기술을 담은 ‘합기술’이라는 책이 출간되었고, 사단법인 대한기도회가 설립되었다.

합기술이라는 이름은 책 출간을 앞두고 다른 이름을 찾지 못해 다케다 소카쿠의 종가에서 쓰고 있던 명칭인 합기술을 서명으로 썼고, 법인 이름은 작명가 백운학 씨가 이 이름을 쓰면 크게 발전한다고 하며 ‘氣道’라는 이름을 써준 것을 활용했다고 한다. 나중에 좋은 이름이 떠오르면 명칭 변경을 하기로 하고 법인이 출범했고 최용술 선생은 총재로 취임했다.

어렵사리 대한기도회가 출범했지만 재정이 열악해서 1964년 회장을 이한림 장군으로 교체했다가 사업에 진전이 없자 김영이란 사람으로 교체했다. 하지만 김영 회장은 도장의 명의를 법인체 명의로 바꾸면서 도장의 보증금을 횡령하고 최용술 선생을 총재에서 해임하는 과정을 거쳐 기도회를 자신의 사유물로 만들었고 이어 단증을 남발하고 도장 허가증을 발행하다가 끝내 돈을 받고 기도회를 팔아넘겼다.

뿐만 아니라 1957년 일본에서 발행된 아이키도 2대 도주 우에시바 기쇼마루 저 『합기도(合氣道)』란 책을 보고서 최용술 선생의 제자들이 도장을 열 때 간판을 모두 합기도로 붙였고 최용술 선생을 합기도의 도주로 내세웠다.

이렇게 최용술 선생은 자신이 만들지도 않은 합기도의 도주가 되어 묘비에까지 그 내용이 적혔다.
그리고 최용술 선생의 사후 그의 대는 국내대와 국외대로 나누어서 주어졌고 그 이름 또한 합기도 도주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최용술 선생의 무술은 이렇게 오해 속에 변질되었고 영욕의 세월을 거쳐 최용술 선생은 1986년 3월 타계하였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과의 인연,

이 책에는 일본 합기도(정확한 구분을 위해 아이키도로 표기함)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온다.

(편집자주; 그 내용을 발췌해 보면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을 다케다 소가쿠 선생에게 추천한 사람이 최용술 선생이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실제 다케다 소가쿠 선생에게 우에시바 선생을 소개한 사람은 신문기자인 요시다 고타로 씨이다. 요시다 기자는 다케다 소가쿠 선생을 홋카이도로 초청한 장본인이다. 극진공수도 최영의 선생에게 대동류를 가르친 사람이기도 한데 그의 집에 나이어린 조선인 시종이 있었는데 그가 최용술 씨인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1922년 교수대리를 받았다. 교수대리가 되면 사람을 모아서 가르칠 수가 있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과 관련한 최용술 선생의 언급은 사실 확인이 된 내용이 없어 옮기지 않는다.

다케다 소가쿠 영감은 공식적으로 대동류의 대를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편집자주: 책의 저자는 다케다 소가쿠로 부터 종가(宗家)자리를 이어받은 ‘사가와 유키요시’ 선생에 대한 정보는 없었던 듯하다.)

 


한국 합기도에 대한 견해

이 책의 저자 김정윤 씨에 따르면 合氣道란 이름은 그 이전에도 일본의 신문 잡지에 간간히 소개되었지만, 덕암 영감의 제자들은 대동류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아이키도 2대 도주 우에시바 기쇼마루 저 『합기도(合氣道)』란 책을 보고서 이런 무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최용술 선생의 무술은 공식적인 무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에 수십 년 동안 ‘유도’와 ‘검도’이름에서 ‘도’자 이름에 익숙한 선생의 제자들이 합기도 이름을 보고는 매력을 느꼈고 그 이름을 차용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50년대 말부터 덕암 영감의 제자들 중 하나 둘 도장을 열면서 간판은 모두 합기도로 붙였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합기도란 무술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아이키도를 창시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이와 같이 한국의 합기도는 덕암 영감에게 대동류를 배운 이들이 일본 아이키도(合氣道) 무명을 무단으로 사용한 이름이다.

그 합기도란 이름을 최초로 사용한 곳은 경북 안동이다. 그들은 아직 생존해 있는데 1980년대 중반 그들은 합기도의 무명을 천신도(天神道)로 개칭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에 대해 김정윤 씨는 “합기도 무명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일본 아이키도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키도의 기술을 깊이 연구하여 한국 합기도의 특성과 우수성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현대 국제사회는 남의 것으로도 개발과 창조로 우수성을 확보해 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고유무예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무명은 반드시 달리해야 할 것이다.

남의 이름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도주(道主)’란 명칭도 그렇다. 국어 사전에 도주란 단어는 없는데 최용술 선생의 제자와 그 제자의 제자 대부분은 그를 합기도 도주(道主)로 불렀다. 그러나 최용술 선생은 합기도를 만든 사람이 아니고 도주는 더욱 아니다.
다음은 책에 나오는 김정윤 씨와 최용술 선생이 대화 중 일부이다.

“선생님의 합기도를 무명으로 쓰고 선생님의 호칭을 도주로 하면 선생님 돌아가신 후에 선생님의 이름은 없어집니다.”

“나는 합기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도주는 더욱 아니다”

필자가 덕암 영감의 지갑에 든 명함을 꺼내었다.

“선생님의 명함에 합기도 도주라고 적혀 있습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관장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결국 최용술 선생은 본인이 만들지도 않은 무술의 창시자가 되고, 도주란 일본식 존칭을 받은 것이다. 이는 그에게도, 대한민국 합기도에게도 매우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지금 대한민국 합기도의 대한체육회 가입을 두고 벌어지는 모든 소동의 씨앗이 이때 뿌려지고 만 것이다.
반세기가 지나서도 수많은 대한민국의 합기도인들을 괴롭히는 진실이 여기 있다.

불미스럽고 안타까운 내용이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이를 분명히 직시하고 인정하며 과오를 바로 잡아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오로지 최용술 선생의 구술에만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고 일부분에서는 사실과 다른 것도 많다.

일본의 유명한 무술잡지《히덴(秘傳)》에서 최용술 씨가 말한 내용을 모두 찾아서 증명하려고 했지만 지명을 비롯해서 어느 것 하나 일치된 것이 없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일본에서의 행적에 대한 글은 모두 진실과 거리가 멀 수 있다. 다만 저간의 사정과 여러 증거로 미루어 볼 때 대한민국 합기도가 일본 합기도인 아이키도의 명칭을 빌려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합기도 단체들이 이 부분을 분명히 인정하고 잘못된 시작을 반성하면서 굴절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할 때 한국 합기도는 진정한 민족 무예로 다시 태어나면서 대한체육회 가입 문제도 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옷매무새 전체를 망치듯이 한국 합기도도 잘못된 시작에서 비롯된 태생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지난 과오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자구 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더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조언을 건네고 싶다.

대한민국 합기도 단체들의 냉철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