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직제자 중 현재 최고참인 타다 히로시多田宏 9단(1929~)의 인터뷰입니다. 총 3부 중 1부이며, 2~3부는 계속 게시될 예정입니다.
[타다 히로시 약력]
1929년 출생. 아이키카이 9단.
1950년 와세다 대학 가라데부 재학 중 아이키도 본부도장 입문, 우에시바 모리헤이, 우에시바 깃쇼마루에 사사
1964년 이탈리아 로마로 파견, 아이키도 보급
1971년 일본 귀국, 아이키카이 본부 사범 활동 재개
아이키도 본부도장, 방위청, 가쿠슈인学習院 대학, 게이오慶應 대학, 도쿄대학 아이키도 기렌카이気錬会, 와세다 대학 아이키도카이合気道会 사범. 아이키도 타다숙多田塾 주재. 국제아이키도연맹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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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합기도연맹国際合気道連盟International Aikido Federation 제공
타다 히로시多田宏 9단 인터뷰
촬영 : 2016년 2월, 겟소지月窓寺 도장
감독 : 기욤 에라드 Guillaume Erard
한국어 번역, 자막 : 성주환 AikidoKR.net
타다 히로시 9단 인터뷰 part 1/3
문 : 무도를 접한 건 언제인가요?
답 : 제가 어릴 때부터죠. 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인은 모두 그랬어요. 초등학교에서 하거나. 우리 집은 활 쓰는 법이 전해지고 있었죠. 집 뒷마당에 아주 훌륭한 표적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쓰던 적색과 흑색이 섞인 활을 제가 물려받았죠. 그걸로 기본을 배웠어요.
문 : 자택에서요?
답 : 음, 내 집에서. 옛날부터 그랬어요. 헤키 류 치쿠린파 궁술(日置流弓術竹林派). 아주 드문 유파예요. 쓰시마에서 500석 이상 받는 (상급) 무사가 하는 정도. 집에 활터가 있는데, 제자 따위는 받지 않았어요. 우리 집의 가전 같은 거였으니까. 옛날에는 모두 그랬어요.
문 : 집 안에서만.
답 : 응, 가족끼리만. 집에 방이 있으면 그걸 도장으로 써서 거기서 수련하고. 마술(馬術)도 다르지 않았어요. 제대로 된 무사는 집에 그런 공간이 있어서 거기서 수련했죠. 학교에 갈 필요가 없죠. 물론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도 있죠.
문 : 그때는 아직 도쿄 지유가오카(自由が丘)였나요?
답 : 도쿄, 지유가오카. 태어날 때는 도쿄대 병원이었고, 그때는 아직 니시카타마치. 아버지기 도쿄제국대학에 있을 때였죠. 1933년에 지유가오카로 옮겼어요. 재미있었죠. 큰 집이었고, 지유가오카는 아직 변두리였어요. 그러다가 초등학교에서 검을 시작했죠. 학생 시절에는 가라데를 시작했어요. 후나고시 기친 선생 밑에서.
문 : 그게 쇼토칸 류…
답 : 쇼토칸. 그렇게 사람들이 불렀죠. 선생은 그리 부르지 않았어요. 선생의 호였으니까요.
시부야 구의 쇼토 지역과 같은 한자예요. 쇼토(松濤)는 ‘솔잎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파도소리 같은 것‘을 말하는 겁니다.
문 : 후나고시 선생을 만나셨나요?
답 : 그야 몇 번이고 만났죠. 후나고시 선생이 도장에서 귀가하실 때 배웅한 적도 2, 3번 있었죠.
문 : 우에시바 도장에 입문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답 : 선생의 존재야 어릴 때부터 알았어요. 대부분 전쟁 중이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3, 4학년 때부터 이야기가 나왔어요. 유명한 사람들이 배우고 있는데, 대단한 무도가라고. 야노 이치로라고 다이이치 생명의 초대 회장이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였어요. 히비야 고교에서 검도를 시작해서 도쿄대까지 계속했고, 나중에 실업단 회장인가도 했고, 대일본무덕회 검도 범사이기도 했어요.
그 야노 선생이 우에시바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에 비한다면야 나는 아기와 다름 없다“고 했죠.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1941년에 제가 만주에 갔을 때, 그때가 만주국 건국 10주년이었어요. 일본의 무도가들이 거기에 모였어요. 만주의 신무전에서 마지막 황제 부의 앞에서 연무회가 있었죠. 거기서 우에시바 선생의 연무가 대단했다고. 나도 가보려고 했는데, 어머니랑 누나가 잔소리가 심해 못갔어요. 제 사촌은 봤죠.
문 : 선생님은 당시 몇 살이셨나요? (연무회에 관한 신문기사)
답 : 12세였죠. 그때부터 전쟁이라 아주 어려웠죠. 그게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와세다 가라데부에서 봄방학 때, 그 얘기가 또 나왔어요. 우에시바라는 인물이. 다케시타 해군 제독이 그의 후원자인데, 외국인 사관을 눈 깜짝할 새에 집어던진다고.
하라다 미츠스케*, 지금 런던에서 가라데 전문으로 있는데, 그리고 지금은 미국에 있는 오시마**와 그 얘기를 했죠. 그 당시 주장이었던 다케다 씨가 말하길, “그러고 보니, 내 친척 중에 우에시바 선생이 쓴 무도에 대한 책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어.”라고. 이름이 뭐였더라, 그때는 아주 잘 알고 지냈는데***. “그럼, 흥미가 있으면 주소 알려줄게“라더군요. 와카마츠 102번지. 와세다에서 걸어서 금방이었죠.
★ 하라다 미츠스케, MBE. 가라테도 쇼토카이(KDS)
★★ 오시마 츠토무, 쇼토칸 가라데 오브 아메리카 설립
★★★ 쿠니고시 타카코, “부도렌슈武道練習” 삽화를 그림
문 : 지금 세계본부도장이 있는 그 자리..?
답 : 그래요, 지금은 와카마츠 쵸 17-18이지만, 당시에는 102였어요.
문 : 입문하려면 보증인이 필요했나요?
답 : 아뇨, 이미 전쟁이 끝난 후였으니. 일반적으로 도장이란 곳은 유지하기에도 인원이 모자랐으니까. 그러니 직접 가서 허락을 받는 식이었죠.
문 : 도장 내에 여전히 피난민이 있었나요?
답 : 있었죠. 3, 4년 더 있었어요. 피난민 한 가족이 있었죠. 80장 다다미(약 40평) 중 20 다다미(약 10평)을 떼어줬고, 그 20 다다미 쪽에서 살고 있었죠.
문 : 수련 일정은 어떠했나요?
답 :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6시 반부터 7시 반, 저녁 6시 반부터 7시 반, 그것뿐. 그 외에는 자유, 하루 종일 거기서 혼자 수련해도 신경쓰지 않았어요. 그야… 깃쇼마루 선생은 직장(오사카 상사)에서 일을 했고, 학생이 5, 6명 밖에 없었으니. 옛날처럼 재벌이 도장을 후원하지도 않았고. 그런 시대는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일을 해야 했죠.
문 : 당시 큰선생의 행적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답 : 큰선생은 도쿄, 이와마 그리고 여행. 이걸 반복했어요. 칸사이 방면에 갔다가 도쿄에 왔다가, 다시 이와마로. 그리고는 다시 이와마에서 도쿄에 오셔서, 도쿄에서 칸사이 지방으로. 오사카의 스이타, 와카야마의 타나베, 그리고 히키츠지 미치오 선생의 도장이 있던 신구. 그런 식이었죠.
문 : 선생이 입문한 당시, 이미 ‘아이키도(합기도)’라고 불리고 있었나요?
답 : 내가 입문한 당시에는 아직 그렇지 않았어요. ‘아이키부도(合気武道)’라고 불렸죠. 공식적인 이름이 아니었어요. ‘합기무도‘라고 하지만. 그러다가, 내가 와세다 대학 학생이었을 때, 클럽을 만들려고 했죠.
당시 우에시바 도장에서 선생님이 강습회를 시작했어요. 큰선생께 오시지 않겠냐고 여쭸죠. 그랬더니 ‘보고한 다음 초청해라‘고 하셨죠. 그래서 당시 교수였던 도미키**** 씨에게 부탁했죠. 그때 ‘아이키부도‘라고 하는 것보다는, 시대가 그랬으니, ‘아이키도‘라고 해서 올렸죠.
★★★★ 도미키 켄지. 도미키 아이키도 설립
하지만 그 전부터 ‘아이키도‘라고도 불렸어요. 대일본무덕회에서 할 때, ‘아이키도‘라는 부에서 그 명칭으로 하고 있었죠.
문 : ‘아이키도‘라는 명칭이 다양한 맨손무술을 통칭하기 위한 게 아니었나요?
답 : 아뇨, 그렇지 않아요. 우에시바 선생의 아이키도를 말한 거였죠. 그렇지만 1942년 만주에서 열린 연무회 당시의 팜플렛을 사촌에게 받았는데, 잃어버리긴 했지만, 거기에는 ‘우에시바 류 합기술‘이라고 적혀있었어요. 소설에도 나와요. ‘우에시바 류 합기술‘이란 건. 어떤 어린이용 소설이었죠.
문 : 기욤은 안드레 노케 밑에서 아이키도를 시작했습니다. 노케를 알고 계신가요?
답 : 노케 씨가 들어왔을 때, 내가… 아마 20대 중반, 노케 씨가 40세 정도였어요. 사실 노케 씨가 오기 전에, 1951년에 모치즈키 미노루 씨가 사쿠라자와 뇨이치*****에게 초청을 받았죠. 사쿠라자와 뇨이치는 거기서는 ‘조지 오사와‘라는 이름이었죠. 마크로바이오틱스. 거기에 그 사람의 관계로, 프랑스에서 관련자들을 모아놓은 곳에 가게 된 거죠. 거기서 시작한 거예요.
★★★★★ 마크로바이오틱스 식이요법 제창자.
그다음 해에는 아베 타다시가 갔고. 그게 1952년. 노케 씨는 아베 타다시에게 배웠습니다. 노케 씨가 온 뒤로 프랑스인들이 많이 오기 시작했어요. 프랑스 대사관의 관계도 있었고. 프랑스 대사관이 후원한 연무를 우에시바 도장에서 했죠. 사진도 남아있어요. 요약하자면, 노케 씨는 아베 씨에게 수년동안 배우고 이건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온 거죠. 그에 대한 기사가 요미우리 신문에 나왔어요.
처음에는 유도를 했다고 해요. 거기서 ‘훌륭한 기술을 익혔다‘고 한 후, 그다음 해에 아베 타다시에게 가서 수년간 배운 거죠. 그리고는 좀더 배우고 싶어 일본에 와서 3, 4년을 있었죠.
문 : 안드레 노케 씨는 선생의 2교가 아주 아팠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답 : 젊었으니까. 20대였으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수련만 했는데. 나는 직장도 없었고, 아이키도와 일본 무도 연구에만 전념했으니까. 노케 씨가 있을 때 연무회 같은 걸 하기 시작했어요.
그가 돌아갈 때 내가 기억하기로는, 당시에는 아직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야했는데, 분명 미국 선박이었어요. 배웅했을 때. 돌아갈 당시 44, 45세였는데, 귀국하고나서부터는 몰라요.
나중에 내가 1964년 10월 이탈리아에 갔을 때, 1965년에 프랑스에 있던 노로 마사미치에게 초대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노로 씨가 다른 한 사람과 같이 연무를 보러 왔기에 인사를 한 적이 있어요.
문 : 공개 연무가 시작된 게 그때부터인가요?
답 : 처음으로 공개 연무가 있었던 게 타카시마야 백화점 옥상… 연무회를 할 만한 곳이 당시 거기밖에 없었어요. 무도관은 물론 있지도 않던 때고. 연무를 하는 데 쓸 수 있는 공간이란 게 없었어요. 아직 히비야 공회당을 빌릴 큰 돈은 없던 때였어요.
타카시마야에서 하고, 그다음에 미츠코시에서 하거나 시부야의 토큐 백화점 옥상에서 하다가, 그 다음에는 미용학교 강당을 빌리거나 신문사 강당을 빌리거나. 여러 곳에서 했어요. 하지만, 정식으로 제1회라고 아이키카이가 지정한 것은 언제였더라…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문 : 깃쇼마루 선생은 큰선생에게서 공개 연무 허가를 받기가 아주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일반에게 공개하는 건 싫다고 했죠.
답 : 원래 일반에게 공개하는 게 아니에요. 대동류도 그랬죠. 다케다 소카쿠 선생도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았어요.
옛날 무도가는 다 그랬어요. 특정한 사람에게만 가르쳤어요. 옛날에는 ‘오토메와자御留流‘라고 불렀죠. 오토메와자는 번藩 내에서만 가르치고 다른 번에는 보이지 않는 기술을 말해요.
그거야 그렇잖아요. 내가 아는 기술을 다른 사람이 알면 내가 불리해지잖아요.
또 하나의 이유는 너무 많이 알려지면 망가져서 그래요. 그러니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가르치면서 아주 조심하는 거죠. 그런 시대였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