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기도와 글쓰기 -제자리걸음

늦은 승단 소감문

합기도와 글쓰기
-제자리걸음

사람 일이 다 비슷한가 봅니다. 머릿속에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막상 해보면 생각처럼 풀리지 않고 시간도 훨씬 더 많이 걸리더군요. 인간의 머리는 세상일을 단순화시키고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나 봅니다. 이번 승단 심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행복하게 웃으며 ‘할 수 있다, 올라간다!’를 외치며 2미터 넘는 가로대를 훌쩍 넘는 높이뛰기의 우상혁 선수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2단을 초과하는 실력을 보이리라! 생각만 해도 뿌듯해지고 우쭐해지더군요.
웬걸요. 서로 다른 기술을 멈추지 않고 물 흐르듯이 이어가고 싶었으나, 기술은 생각나지 않고 동작은 끊어지고 허공에 뜬 듯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더군요. 허둥지둥,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었습니다. 만세, 이번에도 실패입니다!

공교롭습니다. 저에게 합기도를 시작한 시기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시기가 묘하게 겹쳐 있습니다. 벌써 5년이 훌쩍 넘는군요. 저는 저에게 집중하여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 산 것도 아닙니다(저희 딸이 증언을 하겠지만). 보이지도 않는 대의를 쫓아 무미하고 건조하게 살아왔습니다. 본업과 무관한 것(합기도와 글쓰기)을 이렇게 오래 부여잡은 적도 없습니다. 스스로 수련 때 신통방통해 하며 웃음이 나옵니다.
매주 연재하는 글과 매달 연재하는 글, 그리고 저를 문제적 인간처럼 만든 ‘학생들과 평어 쓰기 실험’은 합기도가 없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고, 시작했어도 진작에 관두었을 겁니다.

매주 쓰기 노동에 치여 지냅니다만, 글쓰기의 양은 얼마 안 됩니다. 매주 쓰는 건 A4 용지 반 장 정도이고, 매달 쓰는 것도 A4 용지 3장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마감날이면 어김없이 새벽까지 기진맥진입니다. 날을 새기도 하구요. 이런 비효율도 없습니다. 한 번도 글을 쉽게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러는 이유를 잘 압니다. 글을 잘 못 쓰기 때문입니다. 저는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냥 우연한 계기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늘 어렵고 벅찹니다. 그냥 멈추지 않을 뿐, 쓰기의 고통이 덜어지지는 않더군요.

합기도도 비슷합니다. 지지부진합니다. 오전부에 나오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수련 마치고 옷 갈아입을 때마다 도우들께 하는 하소연이 있습니다. “역시 오늘도 안 되네요.” 젊은 신입회원들이 한두 달 만에 입신던지기와 사방던지기, 전방 수신을 하는 걸 보면, 그 빠른 습득 능력과 신체적 적응에 탐복합니다. 속으로 ‘끄응, 역시 나는 버틸 뿐인 건가?’ 좋습니다. 버텨보죠. 글쓰기와 합기도 모두, 저에게 실패의 맷집을 키워줍니다.

저에겐 합기도가 글쓰기를 이끌고, 글쓰기는 합기도를 초대하고 있더군요. 합기도에서 강조하는 조화와 힘 빼기, 상대에 대한 배려 등은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는 자세입니다. 글쓰기에서도 내러티브(스토리) 얘기를 많이 합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인의 독특성을 글에 담으라는 얘기는 천차만별의 사람을 신비로운 존재로 대하고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를 갖도록 만드는 합기도 수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M. C. Escher)가 왼손은 오른손을 그리고 있고, 그 오른손은 왼손을 그리고 있는 작품 <그리는 손>(1948)과 비슷합니다. 저에게 합기도와 글쓰기는 서로 기대고 있습니다.

<그리는 손 /에셔((M. C. Escher)1948>

그런데 그게 저한테만 적용되는 얘기는 아닐 겁니다. 합기도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삶의 정황과 합기도를 연결시켜 살고 있을 겁니다. 진지하게 합기도 수련을 하는 사람이라면 삶의 태도가 이전과는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낄 겁니다. 고집이 좀 약해지고 타인에 대한 허용의 폭이 넓어지고 웃음이 많아지고 자유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뱃살은 그대로입니다). 저도 합기도와 제 삶을 연결시켜 생각하는데, 승단을 즈음하여 세 가지 정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하나는 부조화의 경험입니다. ‘부조화의 발견’이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 합기도가 ‘조화의 무술’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부조화의 무술’입니다(같은 말입니다). 조화는 부조화를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합기도를 수련하면 할수록 부조화에 대한 감각이 강해집니다. 타인과의 부조화의 발견, 저는 그게 좋더군요. 불화는 서로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생깁니다. 일치에 대한 열망(우리는 하나다!)이 과잉될 때, 조금만 어긋나도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합니다. 오래 수련한 유단자들과도 조화롭게 기술을 주고받지 못하고, 초심자들과도 매끄럽게 기술을 주고받지 못하는 상황. 그 불완전함과 부조화의 경험이야말로 부조화에서 조화를 모색해야 하는 우리 세상살이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겠죠.

이전에는 (말로만) ‘사람은 다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엔 도덕적 당위와 의무감이 앞섰다면, 지금은 약간 달라졌습니다. 사람은 다 다르다. 사람은 각자 처한 상황과 행동과 반응이 다 다르다. 그 속에서 조화를, 평화를, 평등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쿠세(くせ; 癖)’입니다. 나쁜 습관이자 편향입니다. 몸에 밴 것이라 쉽게 고칠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 선생님께서 저를 보면서 자주 지적하십니다. 저에게 쿠세가 많더군요. 팔을 자주 구부리고, 전환을 충분히 하지 않은 채 팔에만 힘을 주고 있고, 우케보다 한 박자 늦게 움직이며, 움직임이 연결되지 않고 멈추는 동작을 자주 합니다. 검을 피할 때도 몸뚱아리는 그대로 놔두고 머리통만 먼저 도망가더군요. 이런 쿠세(습관)를 하나씩 발견한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이 강한 우리는 자신의 움직임이 다른 선택이 필요 없는 최적의 상태이자 고칠 곳 하나 없이 자연스러운 동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굳어버린 습관이 있다니요. 그걸 뛰어넘어야 편향되지 않은 움직임을, 어떠한 변수에도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 몸이 될 수 있다니, 참 어렵지만 행복한 도전입니다.
생각해 보면, 다른 운동은 쿠세를 강화합니다. 개인이 가진 특기(장점)를 찾아 더 발전시킵니다. 축구에서 왼발을 잘 쓰면 그 기능을 극대화하려고 합니다. 그게 성공하면 ‘왼발의 달인’이 됩니다. 합기도에서는 아마도 이럴 것 같네요. ‘왼발만 잘 쓰는 건 쿠세다. 오른발도 잘 쓰도록 수련하라.’ 양발을 다 잘 쓰는 사람에게는 이럴 것 같네요. ‘양발을 잘 쓰는 건 쿠세다. 온몸을 잘 쓰도록 수련하라.’ 합기도는 끝이 없습니다.

<본부도장 오전부 수련이 끝나고 유단자들과 기념사진>

마지막 하나는, ‘시간’입니다. 합기도야말로 시간에 대한 진정한 감각을 길러주는 무도입니다. 합기도에서 강조하는 시간은 ‘현재’입니다. 합기도는 현재성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지금 여기에서 손을 잡고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습관은 사람을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탄력적이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꿔줍니다. 약간 거창하게 말해보죠. 봉건시대는 한 개인을 규정하는 것은 ‘과거와의 관계’였습니다. 신분, 출신, 배경이라는 ‘과거’가 개인의 모든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과거에 매여 옴짝달싹하지 못했습니다. ‘니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말을 아직도 하지만, 이런 질문을 가뿐히 넘어설 수 있는 힘이 합기도에 있다고 봅니다.

합기도는 지금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거기에 집중할 뿐입니다. ‘현재성’은 타인에 대한 생각도 근본적으로 바꿔줍니다. 내가 있고 나서, 타인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타인과 나는 공동존재(co-existence), 즉 동시에 존재할 뿐입니다. 타인이 없다면 나도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합기도는 이 어려운 이치를 너무나 쉽게 온몸으로 깨닫게 해줍니다. 유단자라고 해도 상대에 따라 기술이 전혀 안 먹히는 일을 다반사로 겪습니다. 버티거나 도망가려는 사람이 앞에 있다면, 유단자도 초보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우케를 만난 초보자는 자기 능력보다 더 멋지게 기술을 펼칠 수 있습니다.

합기도 수련을 통해 타인이 내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 그래서 독립적인 개인이 서로를 타인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타인 ‘때문에’, 타인의 작동(作動) 때문에 내가 작동한다는 걸 절감합니다. 그래서 합기도는 ‘주체적인 인간’이 되라는 이 사회의 구호에 반하는, 반시대적 운동입니다. 상대의 상황을 살피되, 적절히 대응하는 순환적이고 역동적인 인간이 되라고 합니다.

도약보다는 제자리걸음, 성공보다는 실패, 발전보다는 반복. 이게 삶과 닮은 모습입니다. 합기도는 반복적인 제자리걸음의 행복을 만끽하게 해주는 무술입니다. ‘오늘도 제자리걸음이지만, 계속 갑니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