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의 좌례(2-1)-조현일 에세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가장 좋아하는 감독 한 사람은 있을 겁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태권V’ 시리즈를 만드시던 김청기 감독을 또래 모두 좋아했었습니다. 육체의 무상함을 슬퍼한 광기어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자신의 몸을 제거하고 머리만을 남긴 파란 해골 13호가 동력장치도 없이 공간을 마음껏 날아다니고, 지리산 어딘가의 동굴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스파르타 수련을 하면서 엄청난 무공을 이어받은 마루치 군과 아라치 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아버지의 시신을 뒤로 하고 세상에 나옵니다.

세계정복의 야망을 꿈꾸는 악인들에 맞서기 위해 강력한 로봇을 제작한 선량한 과학자는 기계는 완성되었지만 무도가 경지에 오른 파일럿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왔지만, 우연히 마루치/아라치를 만나 태권V에 탑승시켜 지구의 평화 유지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았건 과학적인 고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건 상관없이 영화관에서 ‘총천연색’ 컬러의 활동사진을 접한 1976년 겨울방학의 어린이들은 그저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김청기 감독의 상상력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텔레비젼은 여전히 흑백이었으니까요.)

오토모 가츠히로가 ‘아키라’를 제작하고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를 출시한 1984년에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흉칙한 몰골의 외계인이 또다시 저를 포함한 어린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손가락 끝이 밝게 빛나면서 어떻게 되었든 일단 집에 전화를 하고 싶다는 두꺼비를 닮은 식물학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스필버그 감독의 상상력에 또다시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영상제작 수업을 수강하면서 참조한 홍콩 영화들은 이제 군대도 다녀와 철이 든 것 같은 기분은 들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실체를 알 수 없는 근심걱정angst을 안은 덕분에 괜시리 삐딱해지고 싶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들이키고는 멀쩡히 잘 자라고 있는 가로수 뿌리에 안주로 먹은 두부전골을 개워내는 미천한 영혼들에게 한줄기 단비같은 존재였습니다.

삭막한 도시에도 사랑과 낭만이 아직 살아있다는 근거없는 희망. 소독도 하지 않은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다가 갑자기 조준도 하지 않고 두손에 잡은 권총을 마구 발사하는 주윤발의 롱코트도 인상깊었지만, 어쩐지 조직폭력배의 무용담은 제 일상과는 너무 동떨어져 현실감이 없었던 바, 왕정문과 주가령, 임청하가 알록달록한 네온사인의 홍콩을 배경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광동어로 던지는 대사가 과격하다 못해 무례하게 느껴지지만 어쩐지 1994년 당시 신림동 뒷골목의 헌책방과 약국 근처에서 본 듯한 데자뷔를 떠올리게 만드는 왕가위 감독의 퇴폐적 이미지에 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젊은이들이라면 경관 223이 말도 안되는 슬로우모션으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나 ‘그녀가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것이 슬퍼한다’며 점점 크기가 줄어드는 비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신파극을 벌이는 장면을 한번쯤 따라해 보았을 것입니다. 사랑에 실패했다면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전력질주를 하며 눈물 대신 땀으로 수분을 배출하고, 소개팅으로 만나 분위기 좋은 관계가 된다면 금성무가 읊던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군.’이라는 명대사도 한번 쳐보고 싶었겠지요.

대니 보일의 ‘트레인스포팅’에 등장하는 인간 말종(혹은 망종) 친구들이 읊듯 시대가 변하면 농담도 변하고 유행하는 음악도 변하고 담배연기의 냄새도 변한다더니 (아마도 성분이 달라져서 향도 달라지는 거겠죠…) 자그마한 영화관에서 비가 오고 영사기에서 덜덜거리면서 돌아가는 필름을 보던 시절도 지나가고 레이저를 투사하여 선명한 디지털 이미지와 함께 돌비 사운드 시스템이 갖추어진 멀티플렉스의 시대를 거쳐 이제 자그마한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거리를 걷다 멀리 영화간판이 보이길래 매표소에 가보니 마침 시간도 맞고 좋아하는 감독이 맘에 드는 배우들과 만든 영화니 한번 보고 갈까…와 같은 우연과 낭만이 그립다느니 수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 일색이라느니 등의 푸념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하고 영화도 변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우연한 만남은 여전히 반갑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몇 년 전 대만에서 체류하던 시절 아내와 묵던 에어비앤비의 난방이 고장나 축축한 공기에 을씨년스러운 방에서 나가 어디라도 따뜻한 장소로 가야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에슬릿이라는 쾌적한 백화점으로 가보니 마침 휴업이라 어쩔 수 없이 동네의 영화관으로 부랴부랴 들어갔었죠. 중국음식을 좋아하는 저로선 대만 생활이 너무 즐거웠지만 저와 취향이 달랐던 아내는 모든 게 짜증스러웠습니다. 자막도 나오지 않는 무협 영화가 시작되자 ‘아이구…’를 연발하시기 시작했지만, 어쨌거나 춥고 축축하지 않고 따뜻하고 뽀송뽀송하니 그리 개탄할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두 시간이 지나 영화관을 나오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네…’라며 조그맣게 읖조리길래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만일 아내와 취향이 맞지 않는 영화를 보고 나오시더라도 절대 ‘왜 당신은 저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지? 난 너무 재미있었는데…’ 따위의 망발은 하시면 안됩니다.)

‘왜구의 종적倭寇的踪跡’이라는 서호봉徐浩峰 감독의 영화는 재미있다기 보다는 어색한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모든 전쟁이 끝나고 태평성대가 시작된 명나라의 뛰어난 군인이었던 기장군의 호위무사이자 기장군의 검법을 계승한 제자들이 주인공입니다. 기장군은 왜구가 설치던 시절 왜구의 검(오타치太刀)을 개량해 승리를 거둔 전략가였습니다만, 중국의 전통 검의 형태가 아닌 보다 단순하고 실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어 전통을 고수하는 기존의 문파는 이 검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구로 모함을 당해 기장군은 억울하게 퇴직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이미 자리를 잡은 4대 문파에 실력으로 도전하여 정통문파로 인정받기 위해 2명의 무사가 침입하면서 벌어지는 버라이어티한 드라마입니다.

헐리우드 영화나 홍콩 영화에 익숙한 관객은 서호봉 영화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듭니다. 마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츠바키 산주로’에 등장하는 무사들처럼 장장 1분을 서로를 한참 응시하다가 갑자기 발도를 하기도 하고 일부러 과장되고 연극적인 동작을 취하며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죠. 어색한 대사 연기를 하다가도 숙달된 무인으로서의 몸놀림을 보이기도 하는 등 일견 기괴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한 연출을 펼치는 서호봉은 무협소설과 무도의 역사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입니다. 좋아하는 영화 감독의 글이니 어렵사리 구해 읽어보고는 걸출한 문장가의 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근저로서는 ‘무인금음武人琴音'(국내 발간서 제목 ‘무인과 거문고’, 서호봉, 두무곡, 2017)이 번역서로 소개되어 즐겁게 읽었습니다. ‘무인금음’은 중국의 내가삼대문파 태극권과 팔괘장에 어깨를 맞대는 강맹하고 직선적인 공격 투로로 유명한 형의권의 상운상, 한백언, 한유로 이어지는 계보의 에피소드를 엮은 도서로서 서호봉 영화와 내용이 느슨하나마 연계되어 ‘활; 명궁 류백원’, ‘도사하산’, ‘일대종사(감수)’, ‘사부’를 즐기신 분이라면 흥미로운 독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인금음’의 서문의 제목은 ‘중국에는 무릎 꿇는 예절이 없다中華無跪坐’로서 여기에서는 역설적으로 정좌와 좌례의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서호봉은 검호劍豪나 호걸豪傑이라는 단어에 등장하는 ‘호’의 의미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짚어봅니다.

<무인의 좌례(2-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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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윤준환 편집장
대한합기도회 사무국장 및 대한합기도회 중앙도장 도장장 2013년 러시아 월드컴벳게임즈 한국대표로 참가 세계본부도장에서 내제자 생활을 했음 ※ 중앙도장 위치 ※ - 서울시 동작구 사당로 28길 6 (3층) - 4.7호선 총신대입구(이수)역 9번출구 도보 3분거리 - 수련문의 : 02 - 3444 -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