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과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만남

영친왕(英親王, 李垠殿下 1897~1970)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李垠殿下 1897~1970)과 합기도(Aikido)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만남에 대해서 그 의미를 생각하며 글을 정리했다. 영친왕은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로 태어나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고 그해 12월, 11살의 어린나이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다.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융합정책에 따라 일본왕족인 나시모토노 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한국명 이방자와 1920년 4월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고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李王)이라 불렸으나 귀국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나이에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면서 오랜 일본 생활을 했음에도 모국어에 어색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육군 중장이었을 당시 이와마(岩間)에서 살고 있었다.

합기도(合氣道) 창시자 (植芝盛平 1883~1969)

합기도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 1883~1969)는 다케다 소카쿠로부터 배운 대동류 기술을 원류로 하여 기토류 유술, 신음류 검술, 야규류 유술, 강도관 유도 등을 정리 연구하고 거기에 자신의 철학과 만유애호, 세계평화에 대한 종교관을 도입하여 합기도(合氣道, Aikido)를 창시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모든 스포츠가 순위로 우열을 경쟁하는 서양 올림픽 경기에 경도(傾倒)되어 있을때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경쟁을 거부하고 시합하지 않는 조화와 상생, 평화의 무술로 만유애호를 외치는 합기도를 탄생 시켰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 당시로는 혁명과 같은 사건이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일본 정부에서 무도관련 조직을 정부의 통제하에 두기위해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를 만들었다. 이때 우에시바는 전쟁과 무도에 대한 정부통제에 반발하여 부인과 함께 이와마(岩間)에 은거하여 ‘무농일여(武農一如)의 삶을 살게 된다.

니시 가츠조(西勝造1884〜1959) (출처:광명시민신문)

자연치유로 ‘니시 의학(西醫學)’을 탄생 시킨 니시식(西式) 건강법의 창시자 니시 가츠조(西勝造 1884~1959)는 이와마에서 영친왕의 주치의로 건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당시 도쿄에서 무예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이 이와마에 왔다는 얘기를 듣고 군인 신분인 영친왕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영친왕은 우에시바 선생의 연무를 본 이후 각별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집에 수시로 우에시바 선생을 불러 합기도를 배웠다고 한다. 우에시바는 이와마에 땅을 구입하고 도장과 합기신사를 만들었는데 영친왕으로부터 받은 하사금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46년 종전(終戰)이 되고 연합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무덕회가 해산되고 무도 수련이 금지 되면서 무도에 대한 정부통제 기능도 상실하였다. 1948년 재단법인 합기회(合氣会, Aikikai)가 문부성 인가를 받게 되면서 합기도가 만유애호(萬有愛護)를 펼치는 평화의 무술로서 세계적인 운동이 되었다.

이와마(岩間)에 있는 합기신사(合氣神社)

어린나이에 볼모로 끌려간 비운의 황태자 영친왕과 전쟁을 반대하고 이와마에 은거한 우에시바 모리헤이, 전쟁이 끝나고 서로 가는 길은 달랐지만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은 하나였다. 영친왕은 평화의 무술 합기도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우에시바 선생의 자서전에는 영친왕인 이은전하(李垠殿下)와의 각별한 만남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영친왕은 조국이 광복 되었을때(1945년) 환국하려고 했으나 국내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이 좌절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이방자 여사와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 했을 때는 이미 건강을 잃고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오래도록 꿈꾸어온 불우한 이웃을 돕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생전에 부인 이방자 여사와 함께 1966년에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慈行會), 1967년에는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 훈련원인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하여 사회봉사의 뜻을 펴고자 하였다.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출처:이미지투데이>

사회봉사 정신은 사후 이방자에 의해, 1971년 영친왕 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교육시설인 자혜학교(慈惠學校), 1982년 신체장애아교육시설인 명혜학교(明惠學校)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자식은 이진(李晉)과 이구(李玖) 두 아들을 두었으나 맏아들 이진은 어려서 죽었고 이구는 2005년 7월 일본에서 사망했다.

평화에 기여하는 운동으로 합기도가 추구하는 정신에 감명 받았을 영친왕의 모습과 ‘평화의 무술’을 세상에 알리려는 창시자의 뜻을 도와주려 했던 영친왕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것을 몰랐던 사람들이 일본과 국교가 없던 시절 합기도를 엉뚱하게도 시합하는 일반적인 투기 운동으로 바꿔 놓은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파온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루터의 종교개혁과 비교할 수 없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무술계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 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만들어 놓은 기술의 기본원리는 다른 무술들과 구분되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형태를 완성시켰고 합기도를 수련하는 그 자체로 평화와 사랑에 대한 몸과 마음의 완성을 이룬다.

한국에서는 대한합기도회가 그 뜻을 함께 하고있다. <출처:『植芝盛平伝』,『合氣道一路』, 일본Wikipedia:植芝盛平>


<이방자 여사에 대한 참고 영상>
https://youtu.be/mflt9Fpq0eM

<니시 건강법에 대한 참고 글>
http://www.kmtimes.net/news/articleView.html?idxno=18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