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스터와 낯설게하기(2-2) 조현일 에세이

부조리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무력화하는 인지 영역 외부의 거대한 권력에 의해 생산됩니다. 카뮈의 말을 빌자면 ‘부조리는 이성이 설명할 수 없는 상태로서 단지 감정만으로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무언가가 나라는 주체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막연한 감각은 존재하며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는지는 설명될 수 없는, 아니 결코 설명되어서는 안되는 추상적인 힘입니다.

거칠게 일반화한다면 마치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듯 어디에나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 아닌 듯한 오웰의 ‘1984’의 ‘빅브라더’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다. 21세기의 버전이라면 은닉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디지털 신, ‘구글’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벽에 부딪치는 개인은 두려움과 분노에 반응하여 처절히 투쟁하거나 아니면 도피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부조리는 권력이 개인의 반응을 철저히 무시할 때 발생합니다. 체제의 권력은 개인에 대해 무관심하며 개인의 행위는 체제의 권력을 변화시키기에는 너무도 미미하여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물론 개개인이 집결하여 단단한 ‘공통체multitude’를 구성하여 권력에 투쟁적으로 대항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구글에 접속하는 개개인은 이러한 공통체이기는커녕 스스로 익명이라고 착각하면서 자신의 모든 정보를 기꺼이 헌납하는 미미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엄밀한 현실이지요. 카뮈의 부조리 철학의 위대함은 여기에서 빛을 발합니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의지가 제한당한다고 허무주의에 빠져들어야 할까요?

카뮈는 애초에 부조리한 상황을 벗어나는 출구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결론이 정해져 있다면 능동적으로 부조리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부조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특정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인과론의 강박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태도도 중요하겠죠. 부조리는 비논리의 영역이기에 인간의 행위가 인과론에 예속되지 않고 별개로 작동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지프스 Sisyphus

차라리 부조리한 상황을 낯설게 느끼고 이 상황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면서 운명을 이해하고 시지프스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해 나가는 태도가 가장 논리적/철학적으로 유의미한 선택지가 될 것입니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냉소와 불쾌감이 전반적인 분위기로서 지배적입니다만, 이러한 불쾌감에 후속되는 지적인 쾌감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훌륭한 예술은 어떤 방식이든 접하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예술을 향유하는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지적/감정적 만족감과 포만감이 들지만, 시선을 돌려도 더이상 깔끔하게 작품을 망각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예술은 방금 일어난 예술적 체험을 다시금 곱씹게 만들고 파장과 여운을 던지는 작품이지만, 또다시 마음을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들어야만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도끼처럼…

빅토르 시클로프스키 1893~1984 러시아

이러한 불편함을 미학에서는 ‘낮설게하기defamiliarization’ 혹은 ‘소격疎隔Verfremdungseffekt’이라 부릅니다.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이나 관념을 낯설게 하여 새로운 느낌이 들도록 함으로써, 지각의 자동화와 기계적 관념을 피하여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지는 기법으로,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빅토르 시클로프스키V. Shklovsky가 1924년 ‘언어의 부활’이라는 예술선언문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시클로프스키는 ‘예술의 목적은 사물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도록 구성하여 지각되는 그대로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며, 예술의 여러 테크닉은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인식하기 어렵게 하여 지각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키는 데 존재이유가 있다’고 정의하면서, 너무 친숙하여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삶의 진실을 되돌아 보고 새롭게 대면하도록 제안합니다.

시클로프스키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일원으로 예술 작품의 형식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낯설게하기를 통해 정신의 습관적인 태도에 충격을 가해 우리가 바라보는 일상적인 대상이 심미적 대상으로 다시금 유도되도록 강요합니다. 시클로프스키는 낯설게하기 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저서에서 일상적인 보행과 발레의 보법을 비교합니다. 걸음을 걸으면서 자신의 걸음걸이의 의미를 하나하나 생각하고 주위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일상적인 걸음걸이를 낯설게 하고 구조화한 발레의 보법은 걸음 하나하나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의미를 부여하기를 강요합니다. 이리하여 일상적인 걸음걸이를 할 때에도 어색하고 불편하도록 유도하여 ‘일상적인 걸음걸이’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뇌활동과 근육들의 조응운동을 통해 훌륭하고도 아름답게 달성되는가를 상기시킵니다.

“계고는 무도인이 일상(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방식”

계고(稽古)

저는 이러한 낯설게하기의 기법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계고를 행하는 ‘도장’이라는 장소와 유비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키도의 여러 동작과 보법이 인간 신체의 한계점에서나 발현될 수 있는 아크로바틱하고 기형적인 형식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식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아이러니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도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외부 공간과의 이질성에서 낯설게하기를 발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텅빈 공간에 매트만이 깔려 있는 보이드void의 공허. 일상복으로부터 환복하여 도복을 몸에 올리는 순간에도 낯설게하기는 발생합니다.

수영이나 육상의 경우처럼 신체를 움직이기 편하도록 디자인된 운동복이라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입는 도복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형태이자 질감입니다. 심지어 도복의 상의를 고정하는 방식은 후크나 지퍼가 아닌 두꺼운 띠이니 입는 이의 편의나 감각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죠. 물론 오랜 기간 계고를 반복하다보면 도복이 마치 비단처럼 몸에 감겨 일상복보다도 편하게 느껴지는 시점에 있겠지만, 논의의 목적상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의 마음으로 되돌려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 입문 첫날에는 도복이 어색하게 느끼지 않았었던가요? 앞서 시클로프스키의 발레 보법의 분석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아이키도의 보법도 일상적인 걸음걸이와 닮아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의 걸음걸이일 것입니다. 무릎의 각도와 발가락의 방향과 체중의 분배를 면밀히 조정하면서 다리를 내딛지 않는다면 분명히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겠죠. 한발자국 한발자국에 신경과 의지를 집중하며 자기 스스로의 몸에만 정성을 다 하는 데까지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설상가상으로 아이키도는 나게와 우케가 보법을 지키며 면밀히 접촉하는 무도인 만큼 자신의 걸음걸이가 상대의 걸음걸이와 조화가 이루어지는가를 또다시 신경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계고는 무도인이 일상(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방식

 

아이키도(合氣道) 도장 수련풍경

가라테나 권법 등의 무도 체계에도 분명히 보법이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승패를 겨루는 무도에서 상대의 리듬과 호흡을 흐트러뜨리거나 무너뜨리기 위해, 즉 조화를 파괴하기 위해 보법을 시행하는 데 반해, 아이키도는 적극적으로 상대와의 조화를 성립시키기 위한 보법이니 애초에 목적이 전혀 다르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내 옆에 걸어가고 있는 타인의 걸음걸이에 내 걸음걸이의 속도와 리듬을 맞출 필요를 느끼지 못하죠. 제가 예전에 조금 배워보았던 가라테의 구미테에서도 상대의 리듬을 관찰하기는 하지만 근원본질적으로 그 리듬을 깨기위한 전략을 세울 뿐 내 템포와 감각을 상대에 조화롭게 튜닝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복잡하고 신경쓰이고 귀찮은 아이키도적인 ‘조화’는 처음 도장에서 접하는 도우들에게 그저 ‘낯설게’ 느껴질 뿐이겠지만, 계고를 마치고 도장의 문을 열고 일상으로 회귀하는 순간 ‘각성’의 모멘트를 경험하도록 유도하는 무도의 교학 체계에 기반한 기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리를 세우고 중력에 거슬러 한발 한발 내딛는 이 동작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동작이었던가를… 자동차회사 혼다의 자랑거리인 인간형 보행로봇 ‘아시모’가 사람처럼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되기 까지 수천 명의 엔지니어의 노력과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 사실을 돌이켜보면, 인간이 그저 발을 내딛으며 걷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무사가 전장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전투형식을 그대로
체술화한 아이키도의 ‘도장 환경’

‘바람의 검심’ 영화 한 장면

회사원들께서는 비지니스가 ‘전쟁’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지만, 무사가 전장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전투형식을 그대로 체술화한 아이키도의 ‘도장 환경’이야말로 고대 전장을 그대로 시뮬레이션하는 상황이니 이는 비유적이 아니라 문자그대로 전쟁터입니다.

도복을 입고 땀을 흘리며 한 시간여의 전쟁을 치룬 도우께서는 상호간의 예를 갖추고 도복에서 일상복으로 환복하여 도장 문을 여는 순간 해방감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긴 전쟁을 마친 병사가 고향으로 돌아가며 느끼는 이중적인 복합감정, 즉 살아남아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일정 기간 휴식을 마치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고자하는 만족감과 기대감이 섞인 감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평화로우며 편안한가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감정이기도 하죠.

계고는 무도인이 일상(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정신적인 소모가 필요하고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며 상대와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배려의 마음을 요구하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면밀한 조작과 빠른 판단을 통한 임기응변을 필요로 하는, 낯설고 불편한 길입니다. 이 힘든 길을 걷고자 하는 이가 자발적으로 계고에 임하는 이유는 바로 그 개인이 일상의 가치의 크기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윤준환 편집장
대한합기도회 사무국장 및 대한합기도회 중앙도장 도장장 2013년 러시아 월드컴벳게임즈 한국대표로 참가 세계본부도장에서 내제자 생활을 했음 ※ 중앙도장 위치 ※ - 서울시 동작구 사당로 28길 6 (3층) - 4.7호선 총신대입구(이수)역 9번출구 도보 3분거리 - 수련문의 : 02 - 3444 -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