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와 기여(2-1) 조현일 에세이

평화의 무술인 합기도(Aikido)는 기술 전반에 타인에 대한 배려가 밑바탕에 깔려있다.

배려, 이해심과 공감능력이 깊은 인격의
소유자가 가지는 덕목

나눌 배配와 생각할 려慮의 합자인 배려配慮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을 써서 타인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행위’를 가리키나, 이 협의狹義의 정의를 확장해 보면 ‘마음의 씀씀이’와 ‘타인을 향한 존중’, 그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의미로까지 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분들이 ‘배려’를 인간관계에서 발생가능한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하며, 이해심과 공감능력이 깊은 인격의 소유자가 가지는 덕목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단어의 정의를 광의廣義로 포괄적으로 이해하면 ‘배려’라는 개념의 근저에는 타인을 향한 진정한 공감과 이해가 자리잡고 있음에 쉽게 동의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의 장대익 교수는 저서 ‘울트라소셜(장대익, 휴머니스트, 2017)’에서 호모사피엔스의 생태적 성공의 후면에는 인류에 독특한 초사회성超社會性ultrasociality이라는 특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재미있는 주장을 펼칩니다.

울트라소셜(장대익, 휴머니스트, 2017)

인류의 사회성의 진화에 대해서는 수많은 가설과 이론들이 경쟁하고 있는 바,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설이 자리잡기 전에는 ‘초사회성’ 이론도 수많은 다른 가설들과 싸우는 경쟁가설로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상당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갖춘 휼륭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사회성은 사피엔스와 경쟁하던 네안데르탈에 비해 월등히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려던 영장류에게는 매우 절실한 생존전략 중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서에서 장대익은 초사회성을 개미나 벌 집단의 진사회성眞社會性eusociality과 구별하여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보다 확실시합니다. ‘초사회성’에 ‘초超ultra’의 접두어를 사용함으로써 영장류를 비롯한 여타 척추동물과 비교할 때 가장 강력한 사회성을 호모사피엔스가 구현하였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개미와 벌의 초유기체적인 진사회성과 대비시켜 초사회성의 심리적인 특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이겠죠

진사회성은 독립된 개체들의 본능적인 반응이 특정 장소에서 집합적으로 존재할 때 나타나는, 결과적이자 창발적인 현상인 반면 네안데르탈은 충분히 가지지 못했지만 호모사피엔스는 충분히 발달시킨 심리장치를 통한 ‘집단지향성集團志向性collective intentionality’ 기반의 복잡한 ‘의사결정’이라고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의사결정’이라는 개념어에 이미 개체의 ‘자율적인 의지’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의 개념이 함의되어 있으며, ‘지향성’이라는 용어에 ‘의지’의 개념이 함의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 집니다. 따라서 호모사피엔스의 ‘초사회성’은 초유기체를 이루는 개개의 본능이 모인 ‘집단본능’으로서의 사회성(진사회성)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개개의 ‘의지’가 확실하게 반영되어 집단적으로 발현되는 사회지능社會知能social intelligence이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인류는 타자의 감정과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으로서의 사회지능을 확장하여 문명을 수립하고 이 방식을 다른 지역의 호모사피엔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물론 자연세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지칭하는 ‘생태지능生態知能ecological intelligence’의 기여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인류의 기술 발전과 이후 과학혁명을 이루기까지의 과학적 사고는 이 생태지능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정신사精神史가 아닌 물질사物質史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하지만 인류의 생태지능은 문명의 물질적인 조건과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강고히 하는 역할도 하여 타자의 존재를 배척하고 타자가 소유하는 부와 물질적 풍요를 이기적으로, 때때로 폭력을 동원하여 강탈하는 조건을 만드는 악역도 맡아 왔습니다. 인류의 정신사精神史가 아닌 물질사物質史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역사를 기술하면 생태지능의 격상과 발달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문명의 진보와 그 미래의 예견에 생태지능이 주요 인자로 작용하고 있다는 편견을 가질 수 있지만, 이러한 역사관은 초사회성에 기반하는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라는 정신적 조건이 이루어낸 인간(인류) 조건을 완전히 무시하는 어설픈 역사기술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눈부신 과학기술과 막강한 군사력만을 가지지만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던 사회집단은 피비린내나는 전쟁으로 타자의 인간조건을 말살하다가 종국에는 스스로 절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타입의 집단은 호모사피엔스의 진화과정에서 자연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호모사피엔스 집단 중에서도 생태지능과 사회지능의 적절한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어낼 수 있었던 사회집단만이 고된 빙하기를 견디어 내고 농경혁명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지능으로서의 공감능력은 오늘날에는 뇌과학과 인지과학의 연구방식의 발전으로 다시금 연구대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저 인문학적인 연구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뇌가 진화를 통해 각인한 구조적/태생적인 기능에 초점을 맞춘 실증적인 탐구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호모사피엔스의 독특한 능력인 초사회성과 공감능력의 기작機作이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거울뉴런과 인지적인 공감을 가능하게하는 대뇌의 추론능력이라는 가설이 실증적 연구로 이론화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울 수도 있겠습니다.

거울뉴런mirror neurons

먼저 거울뉴런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거울뉴런은 놀랍게도 인간의 뇌가 아닌 원숭이의 뇌의 연구 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습니다. 이탈리아 파르마대학교의 신경과학연구팀은 원숭이의 특정 행동과 연계된 특정 뉴런의 활성화 관계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어떠한 물체를 손바닥으로 잡을 때 활성화되는 복측 전운동피질Premotor Cortex의 기능에 대한 가설 검증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는 자신이 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험자가 무언가 물체를 손에 쥐는 행동을 그저 보고만 있었을 뿐인데도 뇌의 특정 부분을 활성화시키고 있었으며, 연구자들은 어째서 시각적으로 보는 것 만으로도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원숭이는 스스로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특정 행동을 눈으로 보기만 해도 뇌의 F5 영역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지요. 기존의 뇌과학 이론은 스스로의 감각기를 통한 직접적인 감각만이 운동과 연동될 수 있다는 통념을 고수해 왔지만, 원숭이의 간접적 감각이 뇌에 영향을 주어 신체의 운동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놀라운 발견이었죠. 연구자들은 이 기능을 담당하는 전운동피질의 기능부위를 거울뉴런mirror neurons이라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원숭이의 뇌에서 간접적 감각이 직접적 운동행위로 연계될 수 있다면, 아마도 인간의 뇌도 동일한 기전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건 쉽게 추론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뇌에도 거울뉴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경두개 자기자극법TMS; 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뇌파EEG; electroencephalogram, 뇌자도MEG; magnetoencephalogram 연구를 통해 가설 검증될 수 있었습니다. 변화하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전류를 생산하는 전자기유도현상으로 뇌신경세포를 비침습적으로 탈분극/과분극시키는 경두개 자기자극법TMS을 통해 물건을 손에 쥐는 사람의 영상을 보거나 그저 의미없이 팔을 돌리는 대상을 보는 관찰자의 손과 팔에서 운동유발 전위가 발생되는 현상을 발견한 것입니다.

관찰자들은 자신이 그저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직접 운동하여 만들어지는 운동유발전위와 거의 동일하게 높은 전위를 발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후의 후속 연구를 통해 원숭이에게서 발견된 거울뉴런과 인간의 거울뉴런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사실도 발견하였습니다.
후부 상측두구STS; superior temporal sulcus는 관찰된 타자의 행동의 시각정보를 거울뉴런계의 두측 하두정엽IPL; inferior parietal lobule과 후부 하전두회IFG; inferior frontal gyrus로 보내고 이어 복측 PMC 복합체에서 정보가 종합됩니다.

필자가 수련하고 있는 이수역 사당중앙도장

한번만 보고도 그대로 모방하는 명민한 수련생 P-F 거울뉴런 회로의 발달영향

오늘날의 뇌과학자들은 이 신경회로를 두정엽-전두엽 거울뉴런회로, 혹은 하두정엽의 영어 두문자 P와 하전두회의 F를 따 P-F 거울뉴런계라고 부르며 영장류의 운동 관찰, 운동 실행, 모방 행위가 이루어지는동안 활성화되는 영역으로 간주합니다. 가끔 수련중에 시범 동작을 한번만 보고도 그대로 모방하는 명민한 수련생들을 보곤 합니다만, 아마도 이들의 P-F 거울뉴런회로가 남다르게 발달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도장장의 시범연무를 한번 보고서는 도저히 비슷하게도 흉내낼 수 없으니, 제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P-F 회로는 참으로 느려터진 시스템인가 봅니다. 젊었을 땐 어떤 동작이건 한번 보면 곧잘 따라했건만 지금은 그저 바라보며 신기하다고 느낄 뿐 모방이 쉽지 않으니 P-F 회로의 노쇠가 조금 슬프기도 합니다.

앞서 영장류의 거울뉴런계는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다고 언급하였습니다만, 사실은 정보의 흐름은 동일할지언정 정보의 해상도에서는 차이가 납니다. 원숭이와는 달리 인간의 거울뉴런은 운동이 실행되는 방식과 목표, 그리고 의도를 정밀하게 코드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거울뉴런이 시각정보를 즉각적으로 운동신호로 변환시키면서 이와 동시에 타자의 운동의 목적과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타인의 행위를 관찰하면서 나 자신이 그 행동을 복기復棋하고 타 개체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는 거죠. 아, 정말 그럴까…하고 의아해하실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저도 철학을 공부하면서 뇌과학 교과서의 이 대목을 처음 접하고선 진짜 그럴까…하고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으니까요. 타인의 행동만 보고 어떻게 목적과 의도를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교과서는 거울뉴런이 작동하지 않는 케이스를 예시로 제시하여 의심많은 독자를 설득하려 합니다.

타인의 표정을 따라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해

가장 많이 연구된 케이스가 다름아닌 자폐아의 행동패턴입니다. 자폐증을 가지는 아동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인지에 실패하고 언어/비언어적인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며 심한 경우 특정 행동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상동증이라고 하는데, 3살 이전의 발달 과정에서 거울뉴런의 형성에 문제가 있을 경우 상동증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정 표현을 관찰하고 모방하라는 과제 실험에서 자폐아는 하두정엽IPL의 활성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저명한 신경심리학자 J. 콜J. Cole은 관찰과 모방의 프로세스의 역과정에서도 동일한 회로가 작용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콜은 타인의 표정을 따라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운동영역인 거울뉴런이 타자의 감정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혀 내었습니다. 공감능력은 감정적 과정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감정중추인 변연계limbic system과 뇌섬엽insula을 거쳐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이전의 에세이에서 폭력의 발화가 변연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만, 역설적이게도 변연계는 공감능력 발휘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관찰하는 감각으로도 대뇌의 대상피질cingulate cortex에서 통증과 관련된 신경세포가 발화됩니다. 시각적인 관찰만으로도 감정이입이 자동으로 일어나 그 고통을 내가 시뮬레이트합니다. 이러한 공감 회로는 거울뉴런이나 변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대뇌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니 우리는 진정 태생적으로 타인에게 공감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뇌 안에서 발생하는 공감은 철학적으로는 도덕관념의 태생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집니다. 물론 도덕관념은 사회적 환경과 문화의 특질에 따라 차이를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도덕법칙은 보편적이며 타자의 감정과 고통의 공감에 연계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공감능력에 기반한 도덕률道德律은 호모사피엔스가 영장류의 수준을 초월하여 사회와 문화를 조직적으로 구조화하고 확장하는 사회적 진화의 디딤돌이 되었으며 사회구성원 개개인들을 ‘신경(뉴런) 네트워크’로 포괄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이렇게 전개하다보면 다시금 역설에 부딪치게 됩니다. 타자에 대한 전염적인 정서적 공감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간은 어째서 잔인한 전쟁과 살육을 멈추지 못하는 걸까요. 우크라이나에 진입한 러시아군이 벌이는 군과 민간을 구별하지 않는 무자비한 학살을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도대체 인간이 공감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할까…라고 의구심을 가지게 되죠. 하지만 러시아군 장병들 서로는 같은 군소속으로 연대감을 느낄테니…

우크라이나 한 시민이 남편이 러시아군에게 살해된 경위를 설명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여 ‘우리’에게만 공감하고
‘그들’에게는 정서적인 거리를 둔다

20만 년이 넘는 세월을 호모사피엔스에서 현생인류로의 진화에 소비한 우리는 어째서 상황과 대상에 있어서 선별적인 공감을 하고 있을까요. 이러한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가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여 ‘우리’에게만 공감하고 ‘그들’에게는 정서적인 거리를 둔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회집단(외집단)을 향한 폭력, 즉 전쟁은 우리가 ‘우리(내집단)’에게만 강한 정서적 공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이론입니다.

감정이입과 공감능력에 이 능력이 작용하는 ‘반경’이 존재한다는 거죠.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에서도 나타나듯이, 전쟁당사자가 아닌 여타 유럽 국가들과 우리나라에서도 핍박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동정하는 공감 행위가 등장하기도 하기에, 앞서 말한 전쟁을 일으키는 내집단 구성원 사이의 강한 공감과 감정이입과는 다른 형식의 공감기제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감정이입과 공감이 미치지 못하는 거리에 있는 타자에 대해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공감 기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 국면에서 등장하는 대안 가설이 ‘마음이론’입니다.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거울뉴런의 이야기에 이어서 인지적 공감을 일으키는 추론능력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