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연재 3부-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하늘로 돌아간 젊은 거인

사카모토 료마 연재 3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하늘로 돌아간 젊은 거인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긴 연휴를 핑계로 3부를 조금 늦게 올려 봅니다. 독자 여러분들 모두 즐거운 명절 보냈으리라 믿습니다.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나카오카 신타로 두 지사의 노력으로 원수지간이었던 사쓰마, 조슈 두 번 사이에 기적과도 같은 동맹이 체결됩니다.

존왕양이를 기치로 내 걸었던 삿초동맹이 맺어졌고 메이지 유신이라는 역사의 큰 수레바퀴가 돌아갈 채비도 갖추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를 에도 막부가 좌시할 리 없었습니다.

‘존왕양이’란 막부 체제를 종식시키고 허울뿐이던 일본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사상이었던만큼, 삿초동맹 체결은 에도 막부의 존망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일대 사건이기도 하였으니까요.

동맹이 체결되고 몇 달이 흘러 1866년 6월이 되자, 에도 막부는 일본내 각 번들의 군사를 소집하여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조슈번 정벌을 단행합니다. 하지만 막부의 권위가 예전같지 않았던데다 조슈는 사쓰마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있었고, 두 번의 동맹으로 인해 조슈번은 지지세력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조슈번은 에도 막부의 군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합니다.
에도 막부의 조슈 정벌 실패로 삿초동맹의 위상이 대단히 높아진 반면, 쇠퇴해 가던 막부의 권위는 결정적으로 추락해 버립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이 당시 가이엔타이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여 조슈번 군대를 지원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만을 들으면 메이지 유신은 에도 막부와 삿초동맹 간의 전면적인 내전 끝에 이루어진 피의 성과물이었고, 사카모토 료마는 그 와중에 수많은 전공을 세워 유신의 성공에 기여한 전쟁 영웅처럼 여겨질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면 료마는 메이지 유신의 공신으로 대접받으며 생전에는 권세를 누렸고, 후세에는 역사책의 각주 한두개 정도를 장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의 과정에서 몇 차례의 전투가 벌어지기는 했어도 그것이 한국전쟁이나 남북전쟁 같은 전면전으로 비화하지는 않았으며,

료마 역시 전쟁에서 엄청난 무용을 날리는 길이 아니라 전쟁을 최대한 억제하고 보다 평화로운 미래의 청사진을 설계하는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랬기에 사카모토 료마는 단순한 전쟁 영웅이나 정치인의 수준을 넘어서, 일본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위인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에도 막부의 침공을 보기좋게 격퇴한 사쓰마와 조슈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막부를 정벌할 태세를 정비합니다.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세운 삿초동맹 세력과 좌막(佐幕), 즉 막부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건 에도 막부 세력 간에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인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일본 전체를 피로 물들였을지도 모를 두 세력 간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전쟁의 발발도 늦춰졌고, 그 규모도 크게 줄어들었지요. 그것이야말로 사카모토 료마가 오늘날의 일본은 물론 우리에게도 던져 주는 크나큰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 유신의 대의를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전쟁이 아닌, 보다 평화로운 수단에 의해 달성할 마음을 품습니다. 하지만 그 혼자서 이를 실행할 방법도 요원해 보였습니다.

아무리 그가 삿초동맹을 주선한 명사라 하더라도 그 지위는 일개 논객일 뿐이었으며, 대규모 영지를 거느린 사쓰마, 조슈의 번주들이나 몰락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일본의 수장 역할을 거머쥐고 있었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1836-1913)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위치에 있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사쓰마, 조슈 두 번의 주전파 인사들조차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요.

이 상황에서 그는 새로운 해법을 모색합니다.
그 해법은 바로, 사카모토 료마의 고향 도사번의 번주 야마우치 요도(山内容堂, 1827-1872)였지요.
료마는 고향의 번주로 하여금 쇼군 요시노부에게 존왕양이의 대의를 인정하고 일본 왕실에게 정권을 이양한 다음 하야하는 것, 즉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설득해 달라고 건의합니다.

뛰어난 정세 파악 능력과 정치 수완으로 당대 최고의 다이묘로 명망이 높았던 야마우치 요도는, 맹랑하고 무례해 보였을 소지가 다분했던 이 젊은이의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야마우치 요도 두 사람의 대의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몰락해 가는 막부의 운명을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되살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음을 절감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야마우치 요도의 대정봉환 요청을 받아들여 권력을 왕실에게 이양합니다.

이 때가 1867년 11월 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창건한지 264년이 지난 해였습니다.
이 시기에 사카모토 료마는 대정봉환 및 향후 일본 정국의 근간을 이룰 청사진 격인 선중팔책(船中八策)을 작성하는데, 그 내용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새 정령(政令)을 조정에서 세워야 한다.

1. 상하의정국(上下議政局)을 설치하고 의원을 두어 각종 사안을 시기에 맞게 공의로 결정해야 한다.

1. 유능한 공경제후와 천하의 인재를 고문으로 삼아 관직을 내리고 종래 유명무실한 관직을 폐지해야 한다.

1. 외국과의 교류 확대에 관한 공의(公議)를 모으고 새롭고 지당한 규약을 세워야 한다.

1. 옛 율령(律令){} ^{1}을 폐지하고, 새롭고 무궁한 대전을 제정해야 한다.

1. 해군을 확장해야 한다.

1. 어친병(御親兵)을 설치하여 제도를 수비하게 한다.

1. 금은의 시세를 외국과 균형을 맞출 법을 제정해야 한다

 

만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 (출처: 일본국립도서관 웹사이트)
만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 (출처: 일본국립도서관 웹사이트)

 

bin0002
야마우치 요도(출처:일본국립도서관 웹사이트)

 

  ‘하늘이 내린 인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좋은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이 하늘이 내린 인재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에도시대 말기의 격동기에 태어나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도 그렇지만, 대업이 끝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라져간 것도 더더욱 그렇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직후였던 1867년 12월, 나카오카 신타로와 대화를 나누던 사카모토 료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객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우리 식으로 계산했을 때 32세,

그 누구도 이루어낼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삿초동맹을 성사시켰고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도 대정봉환의 대업을 이루어낸 거인의 너무나 급작스럽고 허망했으며 이르기까지 한 최후였습니다.

모두가 전쟁을 당연시하던 시기에 홀로 평화를 내다보았던 사카모토 료마의 부재 탓이었을까요?
대정봉환이 일어난 이듬해인 1868년, 메이지 신정부와 에도 막부의 잔존 세력 사이에는 결국 훗날 보신전쟁(戊辰戦争)이라 불리게 될 내전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적지 않은 인명이 희생되었던 전쟁의 결말은, 피를 불렀던 내전 치고는 그래도 덜 참혹한 편이었습니다.

당장 도쿠가와 요시노부만 하더라도 공작 대우를 받으며 천수를 누렸고, 신센구미(新撰組){} ^{2} 등 일부 극렬세력을 제외하면 내전에 흔히 따르기 마련인 과격한 보복 행위나 민간인 학살 등의 불행한 일도 비교적 적은 편이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 적었다는 것이지, 전쟁이 신사적이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미화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이것을 보면서, 역사학이 아닌 교과교육 전문가인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려 봅니다.

메이지 유신이 끝난 직후 일본이 빠른 시일 내에 근대화에 성공하여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처럼 메이지 유신이 비교적 적은 피를 흘린 채 빠르게 매듭지어진데서도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가 오늘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시사점은, 이처럼 유혈과 폭력이 아닌 대화와 협력으로 평화를 추구하려던 그의 사상과 노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3부에 걸친 사카모토 료마의 인생역정 소개를 마무리짓습니다.
즐겁게 읽으셨는지요?
이어질 3부에서는 사카모토 료마를 어떻게 보면 좋을지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를 풀어가 보겠습니다.

주 1. 고대 동아시아의 성문법 체계로, 중국의 한-당 시대에 걸쳐 발전, 완성된 법전인 율령에 토대를 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각국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일본에서는 8세기 나라(奈良) 시대에 제정, 반포되었음.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율령 체제가 형식적으로는 유지되었음.

주 2. 에도 시대 말기 에도 막부에서 반대파 탄압을 위해 설립한 조직.
검술에 뛰어난 무사들로 구성되었으며, 탈퇴를 허용하지 않는 등 규율이 몹시 강하고 폐쇄적이었음.
사실상 막부에서 고용한 정치깡패라 할 만한 집단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상당수의 구성원들이 사형 등 중형에 처해졌으나, 이들의 활동은 각색과 미화가 덧붙여져 훗날 소설, 영화, 만화 등 다양한 창작물의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음.

이동민
대구교육대학교 졸업(200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교육학박사, 2014) 전) 대구교육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현)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초빙교수 한국교원대, 서울교대, 서울대, 공주대, 전남대 등 출강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한국번역가협회 정회원 주요 저역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역서, 2013, 논형)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공역, 2014, 푸른길) 『지리의 모든 것』 (역서, 2015, 푸른길) 주요 연구업적: How to design and present texts to cultivate balanced regional images in geography (Journal of Geography, 2013) Mindful learning in geography: Cultivating balanced attitudes toward regions (Journal of Geography, 2015) E-mai: dr.dongmin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