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종과 불복종(2-2)-조현일 에세이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저서 ‘불복종에 관하여On Disobedience: Why Freedom Means Saying No to Power'(김승진 역, 마농지, 2020)을 통해 불복종의 기원을 인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찾습니다. 전통적으로 군주와 성직자, 봉건영주, 재벌, 그리고 우리의 부모는 맹목적인 복종을 미덕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역사는 불복종의 행위로 시작되었으며 복종의 행위로 종말을 고하게 될지 모른다.’는 오랜 아포리즘을 인용하면서 맹목적인 복종이 역사의 종말이라 규정합니다.

인간의 불복종의 역사는 아담과 하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자연의 일부로 살며 자연을 초월하려 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살던 아담과 하와는 탯줄을 자르면서 인간적 조화를 벗어나 자연(신)의 명령에 불복종할 때 비로소 독립과 자유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신과의 약속을 깨어버린 아담과 하와는 자유를 이해하고 타인을 인식하고 세상을 낯설고 적대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불복종은 자연과의 유대를 끊고 인간이 개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종용하였으며 원죄를 통해 자유를 얻고 역사의 첫발을 내미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추방 <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하지만 인간은 원죄로 타락하였다기보다는 인간적 조화의 족쇄에서 자유를 얻었으며 자연의 파괴와 그 부산물을 이용한 생산으로 ‘새로운 조화’를 창조해내기 시작합니다. 이 새로운 조화는 종교학에서 ‘현세의 종말’로 불리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도래한 평화의 시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 스스로 만들어낸 새로운 ‘낙원’이며 불복종을 통해 옛 낙원을 버리고 새로운 낙원에 정주하게 된 인간 중심의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롬은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 또한 불복종의 행동을 통해 진화해왔다고 설명합니다. 양심과 신념의 이름으로 권력자에게 감히 ‘아니오’라고 말하는 선구자가 있었기에 인간 종의 영적 발달이 가능했다는 논리입니다.
인간의 지적 발달도 체제에 대한 불복종을 감행하는 역량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사유의 출현이 권력 기반을 흔들어 놓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개인을 억압하려는 체제는 변화라는 흐름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개념을 심어 기성관념의 권위에의 복종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책의 부제가 시사하듯) 과감히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개인이 변화를 선도하고 진화의 최전선에 앞장서 나가는 주체입니다. 프롬은 불복종의 역량이 인간의 역사와 진화의 시작을 가능케 한 주인공이라면 복종을 통해 인간 역사의 종말이 초래할 것이라 경고합니다.

오늘날이야 핵무기를 발사하기 위한 절차가 그리 간단하지 않지만 프롬이 이 글을 쓰던 당시에는 전세계가 핵전쟁으로 인한 멸망의 공포에 떨던 시기라, 권력층의 소수의 군인들이 핵무기 발사 버튼에 손가락을 올려 놓고 있는 또다른 군인에게 죽음의 버튼을 누르라는 명령을 할 것이며 죽음을 자초하는 복종이 이루어진다면 인류의 역사가 종료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핵전쟁이 아니더라도 환경파괴와 무절제한 테크놀로지의 과용 등 인류가 허무하게 자멸하는 시나리오는 수만 가지가 있죠. 인류가 스스로를 멸망시키게 된다면 그것은 두려움과 증오, 탐욕과 같은 태고의 정념에 복종하거나 국가의 주권이나 민족의 명예와 같은 낡아빠진 상투적 개념에 복종해서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자유세계에서는 복종의 강요가
교묘한 설득의 기법을 타고 묵시적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스스로는 모르는 사이에 자본에 복종을 하고 권위에 복종을 하며
불복종하는 자를 이단으로 멸시하는 태도를 학습합니다.

프롬은 모든 불복종이 미덕이며 모든 복종이 악덕이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이와 달리 프롬은 복종과 불복종 사이에 변증법적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합니다. 복종의 이유와 불복종의 이유가 서로 부합할 수 없을 경우 특정 원칙에 대한 복종은 다른 원칙에 대해선 불복종이 될 것입니다. 이 논리를 그대로 뒤집으면 하나의 원칙에 불복종한다면 또다른 원칙에 복종을 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안티고네의 경우에 있어서도, 왕명에 불복종하면 신의 율법에는 복종하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기에, 복종과 불복종의 쌍개념은 변증법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양심적이고 인본주의적 원칙에 복종하면 불가피하게 비인격 법인 체제의 법에 불복종하게 됩니다. 따라서 (다소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복종만 할 수 있고 불복종은 할 수 없는 노예가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불복종만 하고 복종은 할 수 없는 반항꾼이 되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항하는 자는 분노와 실망, 억울함과 정념에 추동되어 행동하지만 여기에는 신념과 원칙이 부재합니다. 프롬은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복종과 굴종을 구별합니다. 그는 체제와 제도의 권력을 향한 복종, 즉 타율적 복종heteronomous obedience을 ‘굴종屈從’으로 정의합니다.

굴종은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할 행위의 핵심에 타자의 의지와 판단이 자리잡고 주체성을 빼앗는 경우를 말합니다. 하지만 나 스스로의 이성과 신념에 따르는 행위, 즉 자율적 복종autonomous obedience은 굴종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나의 의지를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프롬은 또한 불복종의 근간이 되는 인본주의적 잣대, 즉 양심에 대해서도 고찰합니다.

인본주의적 양심 (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양심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나 스스로가 좋아하거나 거스르기 어려운 권위자의 의견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내면화되어 나타나는 ‘권위주의적 양심authoritarian conscience’과 외부에서 부과되는 제재와 보상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인본주의적 양심humanistic conscience’입니다.

아버지에서 시작하여 조직의 상사와 최고권력자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삶에서 수많은 권위자가 특정 행동 방식을 강요하고 이 방식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면 개인은 권위주의적 양심을 내면화하게 되고 이러한 양식이 집단화되면 특정 사회의 문화로 정착되기도 하죠. 이와 달리 인본주의적 양심은 보다 본능적이며 생물학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 태어나 비인간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생을 만들고 무엇이 생의 파괴를 초래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랑의 결실이 다음 세대의 생산이며 칼날을 목을 향해 찌르면 생물학적 기능이 정지한다는 것쯤이야 타자의 제도적 주입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인본주의적 양심이 철저히 내면화된다면 이를 인본주의적 양심과 명확히 구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 프롬의 경고입니다.

내면화된 초자아적 양심은 명백하게 나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경험되는 권위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따라서 권위주의적 양심이 구별되지 않으면 개인은 자신이 권위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가운데 복종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스스로 온건히 존재하려는 인본주의적 양심의 능력은 훼손되고 맙니다.

히틀러 나치체제에 권위에 굴종하는 독일국민<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어째서 복종 혹은 굴종으로 기울게 되는가…라는 물음도 고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히틀러 나치체제에서 독일국민은 무력과 조작적 암시를 동원한 불합리한 권위에 열정적으로 굴종을 선택합니다.
어째서 불복종보다는 굴종을 그토록 쉽게 선택해 버리는가…라는 질문은 안전하게 보호받는 상황을 선택하는 도피 성향이 인간의 본능 혹은 무의식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가설을 가능케 합니다.

굴종을 선택하면 숭배하는 권력의 일부가 되어 전지전능한 양 거짓행세를 하는 체제의 후광을 얻을 수 있고, 체제가 나를 대신하여 결정을 해 주기 때문에 어떠한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결정이 체제에 의해 대신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오류를 저질렀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해방됩니다. 또한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나는 죄를 범할 리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데, 이는 체제가 내가 범죄를 저지르도록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징벌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어찌되었건 체제의 품안으로 돌아가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불복종 혹은 저항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러한 외로움과 오류가능성, 죄를 범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복종의 역량이 자유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자유가 불복종의 조건이기도 하죠. 체제는 언제나 복종은 미덕이요 불복종은 악덕이라 정의해 왔는데, 이는 체제가 개인에게 가하는 지배의 목적, 즉 자원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해 소수의 권력자가 체제의 힘을 이용하여 다수에게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권리를 박탈하기 위해 필요한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배의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다보면 언젠가 소수가 불만을 품고 역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체제를 뒤집으려 할 수도 있죠.

쿠데타Coup d’État, 즉 체제에 대한 타격이 언제나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소수의 권력자는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단순히 무력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복종의 이유가 공포에만 있다면 공포를 극복한 순간 쿠데타가 일어날 테니 스스로 복종을 원하는 심리상태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불복종이 죄악이며 복종이 미덕이라는 프레임은 전지전능한 권력이라는 환상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이성에 대한 신념과 권위에 대한 의심(감히 알고자 하라sapere aude/ 모든 것을 의심하라de omnibus est dubitandum)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이데올로기를 교육체제를 통해 일찌기 심어 놓기를 바랍니다. 복종이 미덕이며 불복종이 악덕이라는 직관적인 이해는 체제의 교육에 의해 일찌기 내면화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상대를 다치게하는 행위는 자신을 해하는 행위이다.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공격성향을 스스로 조정하는 행위야말로 평화의 기술이다. -아이키도 창시자, 모리헤이 우에시바-

무덕회의 간부들이 제국주의 일본의 군인들을 대동하고는 무자비한 군화로 타다미를 짓밟고 눈앞에 섰을 때 창시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 무도계에서 무소불위한 권력을 휘두르던 무덕회는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한 아이키도의 싹을 잘라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무덕회에 대한 전면적인 협조 강요와 체제의 권위로 겁박하는 징병의 의무에 대해 우에시바 옹께서는 단호하게 ‘싫다’라고 말합니다. 창시자의 평화주의적 종교적 신념과 짧은 군복무 경험을 통한 트라우마일 수도 있을 것이고, 침략전쟁에 대한 혐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시 창시자의 마음 속에 일었던 딜레마의 소용돌이를 오늘날의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문파의 절멸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천황에 대한 불복종을 선택하기 위해선 범부凡夫의 용기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굴종을 선택하느니 문파의 절멸이 평화주의 신념의 관철이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21세기의 오늘날의 사람 마음도 헤아리기 힘든데 1930년대의 큰 생각을 품고 있는 사상가의 심중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얼마나 무겁고 날카로웠던지는 상상해 볼 수는 있을 듯합니다.
창시자의 체제에의 불복종은 무도의 이성과 의지를 확인한 소중한 기회이자 초월적 행위였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굴종하지 않겠다는 창시자의 의지를 오늘날 우리들이 되새겨보길 희구합니다.

굴종과 불복종(2-1) 다시보기

굴종과 불복종(2-1)-조현일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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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