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의 저항적 수용과 목적의 재설정-조현일 에세이

14세기경 유럽에 번진 페스트는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가량을 죽음으로 내몰며 중세 유럽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Corbis 토픽이미지-<사진내용 조선메디아>

‘아, 이 상황이 터무니없다는 걸 나도 알아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 상황에 휘말렸고, 이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전염병 창궐으로 불안에 떠는 대중을 향해 상황을 겸허하게 수용하길 바라며 목소리 높여 역설합니다. 1947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출간된 이 소설의 배경은 알제리의 오랑입니다. 의사 리외는 페스트 창궐로 혼란스러운 오랑 시민들을 위해 친구 타루와 의기투합하여 사설위생반을 조직, 치료의 일선에 뛰어듭니다.

처음에는 비관적이고 회의적이던 파늘루 신부와 신문기자 랑베르도 리외의 영웅적 행동에 경도되어 구호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여러 시민들의 희생으로 페스트가 종식되어가는 기미가 보이는 와중에 타루는 역병으로 목숨을 다하게 되자 자신들의 투쟁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죽음의 침상에서 펜을 듭니다.

페스트는 결코 절멸되지 않고 잠복하고 있다가 불의의 순간에 다시금 인간의 행복과 일상을 파괴하기 위해 고개를 들 지도 모르는 위협적인 존재라는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나치에 맞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반항, 그리고 비인간성에 대한 집단적 저항과 연대의식을 우화偶話의 형식으로 담았다고 평가되는 카뮈의 소설은 오랫동안 클래식으로 분류되어 중고교생들을 위한 ‘필독 도서’의 서가에 꽂혀 있었습니다.

‘필독’이니만큼 시험에 출제될 가능성이 커 누구나 다이제스트를 읽기는 하지만 누구도 문학적 향취를 느끼기 위해 카뮈의 ‘페스트’를 손에 들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코로나 창궐 이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온 ‘페스트’를 목도하고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의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적잖이 당황하였습니다. 여타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곧바로 주문서를 넣고 고전 중의 고전 ‘페스트’를 다시금 읽으며 중학교 시절의 추억과 함께 오늘날의 코로나 시국의 비애에 젖었습니다.

‘페스트’ 소설의 저자 알베르 카뮈

카뮈의 우화 소설 초반의 포커스는 공무원의 기만과 대중의 불신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 포커스는 평범한 일상에서 추방당하는 일반 대중의 지위 추락과 사회적 고립에 따르는 불안과 소외 그리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이동합니다. 억압된 사회 구조에 저항하는 개인의 태도와 대중의 집단 행동에 대한 철학적 연구서로도 읽히고 있죠. 엄밀히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영웅적 행동을 하는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서사에 등장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독단적인 죽음 앞에서 위안을 바라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며 삶의 목적과 품위, 그리고 희망을 상실하지 않는 인간상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만 한정적인 맥락에서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저 부조리한 상황에 굴종하지 않고 ‘버티는’ 인간상이 영웅이 될 수 있을까요? 카뮈의 또다른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는 부조리에 대해 본격적인 철학적 사유를 전개합니다.

카뮈는 부조리가 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노력과 종국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할 ‘침묵의 세계’의 운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역설합니다. 카뮈는 이 책에서 자신만의 사유를 전개하며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 자각할 수 있는 부조리의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조리는 우리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굴종하지 않음으로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고 정의하고, 부조리와 투쟁하는 의식이 존재하는 공간을 사막으로 비유하여 집요와 통찰을 가지고 사막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마지막 장에서 카뮈는 그 유명한 ‘시지프의 형벌’을 언급하며 부조리의 철학을 완성합니다. 물론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 집필 이후 자신의 철학적 테마를 또다른 주제로 방향전환합니다만, 부조리의 철학은 카뮈에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인간의 이성과 세상의 불합리한 침묵이 대립’하는 와중에서 부조리가 탄생하였다고 말합니다. 무한무심한 자연에서 이성과 의식을 가진 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라고 생각한 카뮈는 인간은 현실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하려고 싸우고 저항할까요?

카뮈의 화두는 신을 배신하고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올리는 벌을 받은 시지프의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에 대항하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풀어놓습니다. 시지프의 바위는 제우스의 마법 덕분에 꼭대기에 올라서는 직전 시지프의 손에서 빠져나와 굴러떨어집니다.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 했던 시지프에게 헛된 노력의 반복을 경험하게 하는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시지프의 신화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레고Review]>
시지프가 받은 벌은 다름아닌 부조리입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노동으로 영원한 부조리를 반복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거죠. 하지만 시지프는 제우스가 던지는 형벌의 메시지를 전혀 엉뚱하게 해석합니다. 자신의 형벌의 부조리를 수용하고, 무의미한 노동과 실존에도 불구하고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노동 자체를 존재 의미로 재설정한 겁니다.

카뮈는 손끝에서 미끄러져 굴러내려가는 바위를 바라보는 시지프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향해 무겁지만 침착한 걸음으로 내려가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고통의 순간처럼 어김없이 찾아오는 숨 돌릴 틈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시지프)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은신처를 향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매 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훌륭하며, 바위보다 강하다. (…) 시지프는 무력하지만 반항적이며 자신의 비참한 조건을 잘 알고 있다. 바로 그 비참한 조건이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시지프)가 생각하는 내용이다.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혜안la clairvoyance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한다.’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의 무의미의 부조리를 이해하는 혜안, 다름아닌 운명에의 통찰을 얻음으로써 자신에게 형벌을 가한 신들보다 위대한 가치를 획득합니다. 우리가 시지프가 처한 상황이 비극적이라고 간주하는 이유는 시지프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노동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시지프의 절절한 마음을 우리가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이자 무력하지만 반항적인 시지프는 스스로 비참한 조건을 파악하고 있지만, 그 고통을 성립시키는, 운명을 경멸하는 통찰이 반대로 시지프에게 운명에 대한 극복을 가져다 줍니다.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내려다보는 슬픔은 비애로 이어지고, 참혹한 진실에 대한 통탄이 엄습하지만, 시지프는 이 상황의 진실을 인정합니다.

진실의 수용은 고통스러운 진실 그 자체를 소멸하는 방아쇠가 되죠.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라는 또다른 통찰을 얻게 됩니다. ‘산 정상을 향한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이 두 번째 통찰이 시지프가 행복한 영웅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여기에서 ‘시지프의 신화’는 ‘페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오랑 시의 시민들은 자구적인 ‘사설위생반’ 설립을 논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토론합니다.

‘전반적으로 인간은 악하기보다 선하다. (…) 인간은 좀 더 이해하거나 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미덕 혹은 악덕이라고 칭한다. 가장 구제하기 어려운 악덕은 자기가 전부 안다고 믿고 이 이유로 다른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라는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어서 통찰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사랑도 불가능하다.’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삶의 목적을 확인하고 설정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정신과 통찰이 요구됩니다. 통찰은 인간이 끝없는 한계 상황에서 무의미한 투쟁을 계속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 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랑 시에서 페스트와 사투를 벌이는 사설위생반의 행동은 영웅적인가…라는 최초의 문제를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주어진 소여所與의 불가피한 상황을 억지로 해석하거나 그 의미를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였을 뿐입니다. 이 수용의 태도가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카뮈가 ‘페스트’와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 팬데믹을 겪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던지는 물음표입니다.

1949년에 출간된 조지 오웰의 ‘1984’는 카뮈의 질문을 잔인하게 돌려 리프레이즈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전체주의 국가에 저항한 죄로 고문을 받습니다. ‘2 더하기 2는 5’라는 거짓말을 진실로 인정하도록 강요받죠. 전기충격기의 부하가 올라가고 헐거워진 잇몸에서 이빨이 빠져나가고 땀구멍에서 피가 흐르자 윈스턴은 ‘2 더하기 2는 5’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국가는 오히려 전기충격기의 전압을 올리며 당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믿고 국가가 현실을 왜곡하더라도 이를 진정한 진실로 복종적으로 받아들어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결국 윈스턴은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복종적인 노예가 되고 급기야 고문은 종료됩니다. 자기기만을 통한 상황의 수용은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굴종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지만 기만이 아닌 ‘저항적 수용’은 특정 상황에 처한 평범한 개인을 영웅으로 격상시킬 수 있습니다. ‘페스트’의 의사 리외는 불운하게도 오랑 시에 고립되어 탈출을 기도하는 기자 랑베르에게 말합니다.

‘이 모든 상황에 영웅적 행위는 나올 수 없습니다. 이는 품위의 문제라구요.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군 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페스트와 싸워 이길 유일한 방법은 마지막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것

이전의 에세이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팬데믹 상황에 악덕의 가치를 부여한 주체는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악의를 가지지 않는 바이러스에 의해 인간관계 단절의 슬픔과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차질에 의한 경제적 손실과 그저 막연한 감정적 불안을 받으며 이를 악덕으로 정의하고 있는 건 우리 스스로입니다.

이 상황을 고스란히 받아들어야만 하는 부조리에 처한 주체도 또한 우리 스스로이며, 이를 저항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하지만 이 비참한 상황을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바라보는 시지프와 같이 명징한 통찰을 동원하여 투쟁적인 삶의 존재 이유로 가치 전환할 수 있는 주체 또한 우리 스스로입니다.

비참한 상황에서 품위를 잃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주체도 당연히 우리 스스로이죠. 상황을 강요하는 주체가 국가나 방역당국과 같은 체제가 아니라 가치중립적인 바이러스 창궐이라는 너무나 멀쩡한 사실을 인식하는 태도 또한 중요할 것입니다.

단순히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대신 시지프의 혜안을 빌어 오늘날의 팬데믹 상황과 고통을 저항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우리 개개인이 진정한 행복과 삶의 목적을 재설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고쳐 해석할 여지가 없을까요?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