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고(稽古)-조현일 에세이

계고

아이키도의 일상적인 수련을 ‘계고稽古’라고 부릅니다. 비단 아이키도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무도의 수련/훈련을 일반적으로 ‘계고’라고 칭하지만 이 용어의 어원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흔히 사용하지만 생소하기도 한 계고의 어원과 맥락을 짚어보면서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습니다.

‘계고’는 유학 고전 ‘서경書經’의 상서尙書 요전堯典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일본 ‘고사기古事記’의 ‘태안만여太安万呂’의 서문에도 나타나는 용어로서, 옛것古을 꼼꼼하게 따지고 검토하면서 곱씹어稽보고 참조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서경’이 이전 시대의 다양한 텍스트의 테마별 모음집이라는 사실에서 ‘계고’는 아주 오래전부터 빈번히 사용되어온 용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서경 원문에는 曰若稽古帝堯曰放勳, 즉 ‘옛 요왕의 업적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 보니 지극한 공을 세우셨다’고 씌어있죠. 흔히 이 다음 문장의 ‘조금照今’, 즉 ‘오늘에 비춘다’라는 구절과 함께 사용하여 ‘계고조금稽古照今’이라는 숙어로 인용됩니다.

옛것을 되돌아보고 오늘날의 맥락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혹은 어떠한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는 과정이라고 풀어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예전의 의식이나 법칙, 방식, 작법 등을 배우면서 선례先例와 모범이 되는 사례事例를 되돌아보는 학습과정을 일컫습니다. 경학 연구에서 옛 문장을 예로 들어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심오하게 따져 보거나 오늘날의 당면 문제의 관련 맥락에서 옛 사례를 검토하는 세미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계고’의 의미는 사서삼경의 ‘소학小學’의 구조에 잘 나타납니다. ‘소학’은 1187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당시의 교육 제도의 문란을 개탄하여 이전 세대의 교학 체계와 학교 제도, 그리고 교과서의 문장을 상고하여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명하여 편찬한 유교의 윤리사상 요강의 대표적인 텍스트로서 크게 내편과 외편으로 나누어 집니다.

내편에는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계고稽古가 있는데, 앞서의 3편은 수신修身을 다루며, 마지막 편인 ‘계고’는 춘추시대 이전의 성현聖賢의 자취를 고찰하면서 유학의 역사를 돌아보고 유교의 실천 테마인 입교, 명륜, 경신의 의미를 당시의 가치관에 비추어 반추합니다.

외편은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으로 앞서 다루었던 사상과 방법론을 현실적으로 응용하는 유학 정신의 실천을 다룹니다. ‘계고’는 수신 방식인 쇄소灑掃, 응대應對, 진퇴進退를 실행하는 방법론을 이전 성현들의 사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현행現行의 방식을 고민하는 장입니다. 따라서 성현의 고사가 먼저 제시되고 이어 그 교훈을 설명합니다.

아이키도의 계고에서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고 그 의미를 보여주면 이를 배우는 이가 도우道友들과 함께 협력하여 현행하는 방식과 완전히 동일하게 실행되죠. 계고의 목적은 소학제사계고小學第四稽古, 즉 ‘소학’의 네 번째 장인 ‘계고’의 첫 절의 마지막 문장에 잘 나타납니다.

摭往行實前言옛사람의 행적을 실증하고/ 述此篇서술하여/ 使讀者독자로 하여금/ 有所興起감흥하여 분발하게 하라.

무도武道, 특히 일본 무도에서는 형의 연습에 있어서 과거의 달인의 이상적인 형을 수련하는 과정을 계고라 칭하며, 일본의 극 형식인 가부키에서는 배우들이 함께 연습하는 과정을 계고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일본어의 일상 용법에서는 용어의 사용을 무도와 예술에 국한하지 않고 거장의 가르침을 배우는 행위를 통칭하며, 심지어 전통무도와 전통예술과 더불어 피아노나 첼로, 유화나 수채화와 같은 서양의 예술과 기술을 배우는 학습도 계고라고 부릅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계고’가 오늘날 보다 폭넓은 의미로 확장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계고’라는 용어에는 연습의 반복을 통해 축적하여 실력을 향상시키는 노력의 필요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연극 수업에 있어서의 계고는 또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일본의 가부키歌舞伎의 사제師弟간 가르침의 주고받음에서 ‘계고’라는 용어가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현대극이나 드라마에서 배우가 대사를 읽는 연습을 하고 연출가의 의도를 듣고 캐릭터의 감정 표현을 심화하는 훈련도 ‘계고’라고 부릅니다.

특히 연극 무대 본편의 막이 오르기 직전의 연습을 의미하기에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실전에 가까운 리허설을 칭하기도 합니다.

저는 앞서 언급한 역사적 맥락과 현대적인 용어 용법의 확장의 사례에서 우리가 도장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계고’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고’는 올바른 ‘형’을 익히기 위한 반복적인 연습과 자신을 단련하는 훈련의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실전을 치루기 위한 리허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형’의 부분과 디테일이 과거 어떤 의미를 가졌었는지를 지도자의 시범을 육안으로 보며 학습하고 나아가 오늘날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돌이켜 반추하고 스스로 고찰하고 발견하는 세미나의 의미라고 말입니다.

옛 형식을 실증하고 서술하고 학습하여 도복을 입은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감흥하며 분발하기 위한 더없이 중요한, 그러나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일기일회一期一會라고 말입니다.

 

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