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주불능지구(2-1) – 조현일 에세이

계묘년이 저물고 예외적인 따뜻한 겨울이 지나며 벌써 2024년 갑진甲辰년의 봄을 앞두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연초에 누굴 만나든 올해의 계획이 무어냐고 물어보는 인사가 덕담을 대신하였습니다만, 시나브로 신년 계획이나 결심을 물으려니 어쩐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드는 건 저 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예나 지금이나 ‘옛날 사람’이니 누구를 만나건 ‘갑진에는 무슨 계획이 있나?’라고 고리타분한 질문을 던집니다. 올해엔 담배를 끊겠다고 평생 불경처럼 외우고 다니지만 실천하기는커녕 담배값과 체중이 해마다 늘어나는 친구놈들은 콜레스테롤 항목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는 건강검진표를 받아들고는 담배 끊겠다는 하나마나한 결심을 또 이야기합니다. 올해엔 몸관리 차원에 운동을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놈들도 있었습니다만, 장담하건데 술마시는 약속이 더 늘겁니다.

주식투자에 매진하겠다는 놈들에게는 작년말에 발표된 경제지표를 감히 언급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새해덕담은 더러운 기분을 만들기보다는 듣기좋은 이야기가 낫겠죠. 70년대에 태어난 제 나이 또래들은 어찌된 일인지 모두들 나이가 들수록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갑니다. 정치적인 격동을 겪기도 했지만 어찌보면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가장 눈부신 발전을 해온 시대를 충분히 향유하고 살았기에 행운아들(혹은 탕아蕩兒…)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갑이 허락한다면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피워대고 소중한 청춘을 퇴폐적으로 소비하며 무한한 잠재력과 에너지를 도리어 퇴행적으로 발산했지만 역설적으로 틀과 체면의 주박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 불행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자유의 만끽이 청춘의 권리이기에 자유를 획득한 권리라고 착각하고 무절제하게 낭비했습니다. 세계의 잠재력이 무한하다고 착각하였기에 한계와 지속의 가치 따위는 다음 세대가 고민할 문제로 연기시켰습니다. 자본주의체제의 가치가 절대적인 정의라고 오해하고 맹목적으로 굴종하면서 땅투기와 아파트투기에 열중하였기에 젊은 세대들이 우리를 ‘물신주의 꼰대’라고 비꼬는 신랄한 비난에 반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반성의 미덕을 아는 이는 자조적인 후회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만,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속 대사에도 등장하지만, ‘모욕감을 느낀’ 기성세대는 가치관의 분열이 걱정된다는 핑계로 반성하거나 신념을 수정하기는커녕 격렬히 저항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로 심란한 와중에 어떤 젊은이에게서 ‘올해엔 텀블러에 커피를 마시고 샤워 시간을 10분 이내로 줄이겠다’는 새해 결심을 듣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만남을 가지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 삼아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에 대해 새롭게 생각을 다지게 됩니다. 물론 정치나 경제, 개인적 사연과 건강 등등의 원색적이거나 즉각적으로 직면한 어젠다가 가장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중요사안인 분도 있겠습니다만, 이 젊은이의 머릿속에는 ‘기후’가 가장 큰 개인적인 고민거리였던 겁니다. 지난 2023년은 지구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해였습니다. 또한 기후체계가 심하게 교란되어 이상기후가 현저히 나타난, 나쁜 의미에서 ‘기념비적인’ 해였습니다.

기후학자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는 ‘2050 거주불능지구The Uninhabitable Earth'(김재경 역/ 추수밭/ 2021)에서 한계치를 넘어서 행성의 종말로 치닫는 21세기의 기후재난 시나리오를 적나라하게 공표합니다. 웰즈는 21세기에 인류사회를 괴롭힐 기후재난을 12가지로 범주화합니다. 예측불가능한 폭염, 사회복지의 붕괴로 인한 빈곤, 빙하의 붕괴로 인한 해양범람, 주기적 산불,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허리케인, 가뭄, 해수 순환시스템의 붕괴로 황폐해지는 해양생태계, 숨쉴 수 없는 대기, 새로운 질병의 창궐, 경제공황의 주기적 발생, 자원을 쟁취하려는 국가간 전쟁, 미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도래하는 종말론과 자포자기한 사회가 일상을 포기하는 디스토피아… 구체적인 미래 시나리오는 더욱 비관적입니다.

2020년 북극 영구동토의 해동이 시작되었고, 아프리카 2억5천만 명이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2030년에는 전세계가 기후변화 문제를 위해 26조 달러의 비용을 투입하고, 전세계 물 수요량이 공급량을 40% 격차로 추월합니다. 전세계 산호초의 90%가 백화되고 36억명이 말라리아 감염될 것이며 기후변화에 의한 분쟁으로 39만3천 명이상이 사망합니다. 2045년이면 해수면 상승으로 미국에서만 31만 채의 가옥이 침수될 것이며, 2050년에는 기후난민 수가 최대 10억 명을 돌파하고, 여름 최고 기온 평균 35도 이상인 도시가 970개 까지 증가하며, 폭염으로 25만5천 명이 사망하고, 개발도상국의 1억5천만 명이 단백질 결핍을 호소하며 죽어갈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50억 명이상이 물부족에 허덕이고 라틴아메리카 커피농장의 90%가 소멸합니다. 2100년에는 세계 평균 기온이 섭씨 4도 이상 증가하고 전세계 인구 50%가 살인적 폭염에 노출되며, 매년 세계인구의 5%가 홍수로 사망합니다. 1조 달러 규모의 미국 부동산이 침수되고, 기후재난 피해가 년간 100조 달러에 이를 것이며, 북극영구동토층이 81% 감소하고, 100억 톤의 탄소가 대기에 배출되며, 미국 해수면은 80미터 이상 상승하고 1인당 GDP는 50% 이상 감소합니다.

우리가 겪는 지금의 위기를 제외하면 여태까지 지구는 다섯 차례의 대멸종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대멸종이 일어날 때마다 삼족을 멸하듯 화석 기록이 전멸할 정도로 철저하게 종의 절멸이 이루어졌기에 학자들은 ‘진화의 리셋’이라고 부릅니다. 다양한 생물 종의 진화 관계를 나무 형태로 보여주는 그림을 계통수系統樹라고 부릅니다만, 이 다이어그램을 자세히 보면 심장과 허파가 맥동하듯 일종의 리듬을 가지고 확장과 붕괴가 반복되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약 4억5천만 년 전의 1차 대멸종에서 지구상의 86%의 종이 소멸했고, 7천만 년 뒤의 2차 대멸종에서 75%가 소멸했습니다. 1억 2천5백만 년 뒤의 3차 대멸종에는 96%가 소멸하고 5천만 년 뒤에는 80%가 소멸합니다. 1억 3천5백만 년 후에 일어난 가장 최근의 대멸종 때에 다시 75%가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혜성의 지표면 충돌이 원인이었다고 생각되는 공룡의 멸종을 제외하면 대멸종은 모두 예외없이 온실가스에 의한 기후변화에 기인합니다. 2억 5천만 년 전에는 지구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올라가면서 대기 온도가 5도 증가했는데,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온실가스인 메탄이 방출되면서 지구대기의 온난화가 가속화되었으며, 결국 일부 종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절멸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인류는 지난 어떤 대멸종보다도 10배 정도 빠른 속도로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산업화가 시작되기 전의 인류 역사와 비교하면 100배의 가속화입니다.

어떤 학자는 지구온난화가 산업혁명 이후 수세기에 걸쳐 축적되어 왔기에 이전 세대의 도덕적이자 경제적 부채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기 중에 배출된 탄소 중 절반 이상은 불과 지난 30년 사이에 배출된 온실가스이니 이전 세대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도 어렵겠습니다. 지구의 자기정화능력을 초월하는 피해를 정량적으로 계산해보면 지난 30년간의 피해가 지난 수천 년 동안의 피해보다 더 막심하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 체결로 기후 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과학적 합의가 공포된 것이 1992년이니 기후변화의 문제를 인식하고도 환경파괴를 멈추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었다는 비난도 피하기 힘들 것입니다. 지금의 양상이 이어진다면 2100년이 되면 지구의 평균 기온은 4도 이상 증가할 것이며 아프리카, 호주, 미국, 남아메리카의 파타고니아 북부 지역, 아시아의 시베리아 남부 지역이 직접적인 열기와 사막화, 홍수로 거주불가능한 지역이 될 것입니다.

출처:네이버 포토뉴스
출처:네이버 포토뉴스

주지하시다시피 기후변화와 가뭄으로 수년 전 촉발된 시리아 내전으로 100만이 넘는 시리아 난민이 유럽 곳곳으로 확산되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난민으로 인한 사회적 충격이 불러일으킨 공황 상태 때문에 오늘날 서구권 전체가 ‘포퓰리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다수입니다.

방글라데시의 침수 가능성이 실현되고 나면 지금보다 10배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겠지만, 기후 재난으로 인해 사회불안이 가중된 각국들은 도움이 절실한 이민자 수용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계은행은 2050년에는 세계 기후 난민이 1억 4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는데, 이는 현재 유럽이 겪고 있는 시리아 난민 충격의 100배 규모입니다. 기후협약의 선구자였던 교토의정서는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협약 이후 20년 동안 기후 문제를 대변하고 관련 법안을 제정하며 친환경에너지를 보급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협약 이전의 20년과 비교할 때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2016년에는 파리기후협약이 체결되면서 기온상승을 2도 이내로 유지하는 것을 전 지구적인 목표로 설정하면서 2도 상승의 온난화가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떠들썩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협약에 서명했던 모든 국가들이 약속을 파기했고 협약의 요구 조건을 제대로 이행하는 산업 국가는 전무했습니다. 2도 상승의 시나리오의 공포와 끔찍한 미래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정치/언론조작으로 이 사실은 철저히 은폐되었죠. 현상황까지 오게 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국가수반들이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으며, 기후변화 이슈가 대중의 공포심을 조장하는 상황이 두려웠을 수도 있으며, 테크놀로지를 맹신하고 자본주의의 시스템적 균형을 맹목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파리기후변화협약에 참석한 국가수반들
파리기후변화협약에 참석한 국가수반들(출처:네이버 포토뉴스)

당파적인 탁상공론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헀는 지도 모르며, 협약을 무시하고 자국의 이익이 언제나 우선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로 강한 좌파성향을 띠는 환경론자들에게 대중이 회의적인 눈길을 보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며, 도시에 밀집해 있는 생활패턴에 익숙한 사람들이 자신과 동떨어진 생태계의 운명에 무관심해서였을 지도 모릅니다. 환경학계의 현학자들이 던지는 온갖 전문용어와 복잡한 그래프를 보면서 대중이 혼란을 겪었을 수도 있으며, 기후변화의 속도를 이해하는 데 서툴렀거나, 내가 무리해서 이해하거나 행동하지 않아도 엘리트들이 할 일을 할 것이라고 위임해 버렸거나 맹목적인 추종과 지지를 해 버렸는 지도 모릅니다.

혹은 우리 사회가 충분히 탈공업화되었으며 재활용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으니 걱정할 필요없다고 단정하고는 아직도 수많은 일상용품이 탄소를 가득 품은 화석연료를 가공하여 만들어진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점점 확장되어 가는 일상적인 무지의 ‘평범함’에 매몰되어 기후위기를 마치 소시오패스처럼 애써 지각의 스펙트럼에서 제외하는 테크닉에 통달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후변화가 전지구적인 규모에서 진행되기에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치부하거나 우리 개개인의 삶을 파멸시키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였거나, 믿고 싶지 않지만, 내가 사는 동안에는 극단적인 수준까지는 진행되지 않을 테니 내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의 사람들, 그리고 훗날 초토화된 지구를 계승할 후손들의 운명은 눈꼽만큼도 관심없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파괴행위를 정당화해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지구상의 어느 누가 타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출처:네이버 블로그 키즈현대
출처:네이버 블로그 키즈현대

현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기후위기 문제는 이미 우리의 직관을 안도주의와 패배주의와 자조自嘲로 노예화시켜 놓았기에 애초에 어디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파악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환경학자들은 흔히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를 철학자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이 ‘초과물hyperobject’이라 부르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초과물’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서 인간의 지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을 말합니다.

기후위기의 문제는 그 규모와 범위, 그리고 파급효과와 극단적인 결과 등을 미루어볼 때 이미 초과물의 정의를 넘어선 불가해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자 들뢰즈의 ‘전쟁기계’의 개념을 빌어와 스스로 규모와 잔혹성을 증가시키는 메커니즘이라고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죠. 우리가 이 초과물적 대상과 전쟁을 벌이더라도 대상은 그 투쟁적 성격을 증가시킬 뿐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대상을 파괴하기 위한 폭력성이 대상을 재무장시키는 악순환입니다.

<거주불능지구(2-2) 이어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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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