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승총과 선택적 역행(3-1)-조현일 에세이

밀라노

특정 맥락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보면, 물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만, 어딘가 주름이 잡히거나 결절이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역사적 맥락의 매듭이 도드라지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1522년 4월 27일 밀라노 북쪽의 비코카라는 작은 마을이 이런 역사적 흐름의 ‘주름’과 ‘매듭’의 장소였습니다.

농사를 지은지 한참되어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비코카 서쪽 들판에 마치 드라이아이스를 뿌린 무대처럼 뿌옇게 걸려 있던 아침 안개가 장막처럼 걷히고 칼 흉터투성이의 얼굴에 덥수룩한 턱수염의 무시무시한 얼굴표정을 한 스위스 파이크 병사들이 전투대형으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파이크pike는 당시 유럽에서 흔히 사용되던 보병용 창으로서 4미터가 넘는 길이에 나뭇잎 모양의 25cm 길이의 창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중세 스위스 파이크 병사 재현(출처:종이매의 역사산책 블로그)

기원전 300년 경 지중해의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군이 사용한 기록이 있는 바 1500년이 지난 이탈리아에 파병된 스위스용병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역사를 가진 무기입니다. 파이크병 혹은 파이커들은 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직사각형의 대형을 만들어 행군했기에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숲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또한 대형의 유지가 중요했기에 빠른 속도로 돌진하는 것보다는 한발한발 천천히 이동하였겠죠.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북을 두드리는 고수가 사기진작에 앞장서 있었습니다. 백전불패의 전쟁의 개들 스위스 파이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러 자신들이 오늘 전멸할 운명은 꿈도 꾸지 못했겠죠.

출처:dogdrip.net

스위스 파이커는 주머니가 두둑한 클라이언트로부터 일정 보수를 받고 그 금액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전투에 임하는 용병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전투의 프로답게 한창 창질을 하다가도 점심시간이 되면 휘두르던 창을 멈추고 배식대로 향합니다. 맞서싸우는 상대가 아마추어라면 망설임없이 목을 그어버렸지만, 만약 칼을 든 상대가 어딘가로부터 흘러들어온 용병이라면 생명을 끊는 일은 피하려 했습니다.

눈앞의 상대가 내일의 동료가 될 수도 있고 정치적인 목적이 없이 전투에 임하는 프로페셔널을 향한 무사들간의 암묵적인 존경도 있었을 겁니다. 그날의 스위스 파이커 용병은 명석하고 호전적인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고용주였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그의 장인 루이 12세가 시작한 스페인과의 전쟁을 계승하였고, 루이 12세는 아버지 샤를 1세 도를레앙에게서 이 전쟁을 물려받았습니다.

1494년에 도를레앙이 도발한 전쟁이 시작된 이래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은 본토가 아닌 양질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북이탈리아의 비옥한 계곡과 상업이 융성하지만 거대 국가로서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서로간에 치열한 금융 경쟁을 벌이고 있던 부유한 도시 국가들을 군사적으로 점유하고 그 통치권을 차지하기 위해 크고 작은 전투를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파이크 용병(출처:네이버블로그 ‘학생의 근세사’)

당시의 전쟁은 오늘날의 양상과는 달라 비전투원과 군인의 구별이 확실하였습니다. 국경 근처 혹은 전장이 되는 장소 이외에서는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양젖을 짜는 모습이 일상적이었죠. 프랑스는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동맹군보다 더 많은 수의 군인들을 동원할 수 있었고 더구나 충분한 재정으로 스위스 파이커 용병들을 보유할 수 있었기에 승산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빈국을 면치 못하던 험준한 산지 출신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멀리 외국까지 와 무기를 든 용병들은 매우 용맹하고 잘 단련된 보병이었습니다. 무거운 갑옷과 랜서와 도끼와 검과 같은 말 탄 기병을 위한 복잡한 무기체계를 익히지 못한 스위스용병들은 대신 파이크와 같은 단순한 무기의 달인이었죠.

예측하기 힘든 전투상황에 따라 적합한 무기를 골라 대응하는 전술이 프랑스 기사단의 전투방식이었다면 파이커들은 한 가지 무기의 용법을 갈고닦아 자신의 손발과 같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진 집단 전술을 구사하며 동향 출신의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모여 단단히 버티는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나 부르고뉴나 프랑스 최고의 기사들과 맞붙어도 절대 밀리지 않았습니다.

프로스페로 콜론나

파이크 대형은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기병이건 보병이건 이들의 진군을 막을 수 없었고 자신들의 능력을 전장에서 여러번 증명하게 되자 전술적 자신감 혹은 오만에 파이크와 같은 무기에 대항할 수 있는 전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헛된 믿음에 빠져 있었죠. 수비군의 입장인 비코카 토성의 수비대는 스위스 파이커의 전술을 처음 접한 건 아니었습니다. 70을 넘긴 동맹군의 노사령관 프로스페로 콜론나는 전장에서 젊은 시절과 장년의 경력 대부분을 프랑스군과의 피칠갑으로 장식한 백전노장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크로도바와 함께 복무하며 다양한 군대의 다양한 전술을 접했고 19년 전 체리뇰라 전투에서 스위스 파이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힌 전공도 있었습니다. 코르도바군이 한참 밀리던 전투상황에서 코르도바와 콜론나는 당시에는 비효율적인 화약무기였던 휴대 화기의 운용을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파이커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었습니다.

당시의 휴대용 화기였던 기병용 화기 ‘카빈’과 비슷한 종류의 아쿼버스arquebus(화승총)와 보다 구경이 큰 머스킷은 그 당시에도 100미터 떨어져 있는 병사를 맞출 수 있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다만 충분한 훈련과 연습을 거치지 않으면 장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목표물을 노려도 탄환이 일정한 궤적을 그리지 않아 운이 좋아야 맞출 수 있었죠. 그러나 파이크 대형은 다수의 병사들이 촘촘하게 열을 맞춰 있었기에 그리 신경써 노리지 않아도 명중 확률이 상당히 높은 ‘이상적’인 타겟이었습니다.

아쿼버스arquebus

1522년 당시에 중국에서 유래한 화약을 사용하는 무기는 전술가들에게 전혀 새로운 도구는 아니었습니다. 대포는 이미 1300년대 중반부터 공성용 무기로 사용되어 왔고 전략무기로서 그 진가를 일찌감치 인정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공성전이 아닌 일반 보병전투에서는 사정거리가 길지 않고 장전 속도가 느린 원시적인 휴대용 화기인 아쿼버스는 그리 큰 인기를 끌지 못했죠. 하지만 1522년 4월 27일의 그 날은 무언가 달랐습니다.

콜론나 사령관은 아쿼버스 병사들을 수개월에 걸쳐 집중훈련시켜 집단대형에 대한 ‘일제사격’의 노하우를 충분히 숙지시켜 놓았다는 점이 달랐죠. 일단 콜론나의 포병대가 대포를 발사하여 270미터 떨어져 전진하고 있던 파이커 대형을 흐트렸습니다. 일제사격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아쿼버스를 발사하는 일선의 병사들의 숫자에 목표물의 숫자를 대응시켜야 했습니다. 총탄의 숫자보다 파이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면 아무리 일제사격을 가한다 하더라도 사망한 병사들의 시체를 밟고 넘어 전진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제 포탄이 빠른 속도로 날아와 대형을 반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직사각형 대형을 유지하려는 파이커들은 포탄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아 포탄의 궤적을 따라 캔버스의 붓질처럼 피가 직선을 그리며 뿌려졌습니다. 상상과는 달리 포탄의 크기와 막강한 운동에너지 때문에 탄을 정면으로 맞는 병사의 몸에는 구멍이 뚫리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폭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료의 뇌수와 잘게 깨진 뼈가 튀는 전장을 이미 수없이 경험한 파이커들은 둘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대형을 유지합니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8천의 파이커 중 거의 천 명이 희생되었지만 진군은 느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콜론나의 아쿼버스 총병들이 원하는 바는 이미 이루었습니다. 토성의 해자 근처에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도착한 7천의 파이커들은 장창을 세우고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고, 잠시 멈춰 선 파이커들을 향한 아쿼버스가 일제히 불을 뿜었습니다.

일제사격은 일반적으로 3열로 이루어진 총병들이 발사를 끝내고 뒤로 물러나면 장전이 완료된 총병이 곧바로 방아쇠를 당기고 후열로 물러나는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후열의 총병은 다시 장전을 위해 총열을 막고 있는 거스름을 빼내고 다 탄 화약을 버리고 다시 새 화약을 꺼내 아쿼버스의 조그만 접시에 털어내고 화승에 불을 붙여 타오르는 도화선을 보며 발사시간을 가늠하고 아쿼버스를 지지하는 나무다리를 세우고 적을 향해 총구를 지향합니다.

화승총 (출처KBS1)

타오르는 화승에 입바람을 불어 심지 표면의 재를 제거하고 불꽃을 되살린 후 화승을 꺾어 용두의 끝부분에 끼우고 방아쇠를 천천히 당기면 용두가 천천히 하강하면서 불이 붙어 있는 화승의 끝부분이 화약접시의 점화약에 접촉됩니다. 밝은 불꽃과 하얀 연기를 뿜으며 점화된 화약은 총열 내부에 미리 넣어둔 화약에 인화되고 폭발이 일어나면서 가스가 팽창하는 힘으로 납탄을 총구에서 빠져나오게 밀어냅니다.

훈련된 병사라면 2분 정도 소요되는 과정이죠. 오늘날의 탄자는 작은 직경의 단단하고 얇은 금속으로서 텅스텐이나 구리 혹은 열화우라늄으로 코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총알은 30그램 정도의 순수한 연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목표물에 부딪히면 순간적으로 변형되어 버렸습니다.

쐐기 형태가 아니라 부정형의 별 모양의 납탄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면서 옷과 오물을 함께 끌고 들어가게 되어 총알을 맞은 사람은 심각한 감염에 노출되었습니다. 또한 탄자의 운동에너지가 강하지 않아 들어가는 구멍은 있었지만 신체를 관통할 수는 없어 몸 속에서 이리저리 튀며 장기와 조직을 갈갈이 찢어놓았습니다. 부서진 뼈가 파편화되어 조직에 박혀 목숨을 건지더라도 의사가 뼈를 추리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항생제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는 어쩔수 없이 총탄을 맞아 훼손된 장기를 적출하거나 팔 혹은 다리를 절단하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아쿼버시 시연(사진:네이버 블로그)

오늘날의 구리 케이스에 싸여진 화약이 터져 탄자를 전진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흑색화약에 직접 불을 붙이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아쿼버스는 엄청난 소음과 독한 냄새의 연기를 뿜어냅니다. 매캐한 총연이 참호를 가득 메우고 열기가 식으며 천천히 찬 공기 아래로 내려앉자 비명과 욕설이 들끓기 시작합니다. 시체는 참호에 묻혀 점점 매몰되고 스위스용병의 상징인 사자의 깃발은 거꾸로 꼳혀 있습니다. 총알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살육합니다. 7천 중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은 2천 정도가 겨우 일어나 절뚝거리며 퇴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천은 수습하지도 못할 시체가 되어 참호에 박혀버렸고 나머지는 전장에서 뒹굴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파이커의 승산을 맹신했던 프랑스군의 사령관 로트레크 자작은 남은 이들을 수습하여 질서정연하게 퇴각을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전장으로 전진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죠. 승기를 놓친 로트레크는 밀라노를 떠나 철수해버렸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코카 전투는 역사의 전환점이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고 하기엔 빈약한 전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개 낀 1522년의 4월 아침 토성의 해자에 파이커들의 시체를 쌓은 아쿼버스 일제사격은 유럽 전역에 개인화기의 효율적 운용과 끔찍한 파괴력을 증명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화약무기가 유럽과 신대륙의 모든 전쟁 양상을 지배하기 시작(출처:dogdrip.net)

비코카 전투는 화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아쿼버스로도 전술 목적을 이룰 수 있으며 규율에 맞추는 방식을 대강 배운, 혹은 그리 많은 시간을 훈련에 할애하지 않은 초보자도 상상을 초월하는 살상력을 지닌 무기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비코카 전투가 종료되고 유럽의 모든 군사전문가들은 파이커에 맞서는 아쿼버스의 능력을 인정하며 다시 이전의 근접전 시대로 회귀할 수 없음을 직감하였습니다. 이후 4세기 동안 대포와 개인 휴대 화기를 비롯한 화약무기가 유럽과 신대륙의 모든 전쟁 양상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전쟁에 관련한 모든 전략, 전술, 병참, 편성과 조직은 물론 사회의 지배층과 그 통솔을 따르는 군인을 위시한 각 계급의 역할도 총기의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사용을 기초로 결정되었습니다. 전쟁역사학자 폴 록하트는 저서 ‘화력'(이수영 역, 레드리버, 2023)에서 비코카 전투의 사례를 통해 화기는 테크놀로지가 어떤 요소보다 전투방식과 작전수행 방식, 전쟁을 준비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시대정신이자 새로운 전투의 패러다임으로 이전해 가는 주역이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승총과 선택적 역행(3-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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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