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의 좌례(2-2)-조현일 에세이

호걸豪傑은 젊은이들을 현혹하여 무리를 만들어 
이들을 선동하여 소란을 피우는 자

중국이 근대에 접어들기 전 시대의 호豪라는 글자는 좋은 뉘앙스보다는 제멋대로인 젊은이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주로 해당 지역의 지도자나 어른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율적인 의지를 가지는 사람을 호라고 불렀다고 하죠. 문헌의 예를 들면, 호고豪賈는 기존 상단에서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는 상인을 가리키고, 호걸豪傑은 젊은이들을 현혹하여 무리를 만들어 이들을 선동하여 소란을 피우는 자를 지칭하였으며, 무협지에서 흔히 영웅으로 등장하는 호협豪俠이라는 단어는 마을의 규율을 지키지 않아 사법기관에서 강제로 추방한 개인 폭력행위자를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초한지 유방(출처:구글 검색)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리더쉽 부재로 많은 경우 명문에 명시되지 않은 느슨한 법률에 의존적인 공동체에서는 사회질서가 쉽게 무너져 호협이 발생하기 마련이었습니다. 도처에 초법적인 행위를 하는 집단이 발생하고, 이들이 권력기반과 경제적 부를 축적하게 되면 새로운 조직질서를 구축하고, 이후에 정치적인 변화가 오고 세상이 바뀌고 나면 새로운 귀족계급이 되곤 했었습니다. 이러한 무리의 조직 구성원들은 법률의 지엄함을 그리 따지지 않았으며, 때에 따라서는 비열하고 배덕한 성품을 가진 이들도 있었으니, 세상이 바뀌면 이들은 더이상 호협으로 불리기 꺼려하게 되고 신흥 지배층이 되기도 하였던 겁니다. 이와 같이 불안한 사회 질서로 신분의 상승과 몰락은 흔히 나타나는 사회현상이었습니다.

역사서에서는 호방하고 소탈하게 표현되는 영웅 유방劉邦이 한때 호협이었으며 한 무리의 호협을 이끌어 한漢을 세웠지만, 한 초기에는 많은 지식인들과 사회질서에 순응하던 무고한 민간인들이 재해 수준의 고초를 겪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호’들과는 달리 ‘협俠’이라 불리던 계층은 이들 지식인과 순응계층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는데, 귀족적인 성벽과 되도록이면 폭력을 통해 사안을 해결하기보다는 이성에 기대는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협’은 일단 권력을 쟁취한 ‘호’에 의해 숙청당하고 조정朝廷에서 퇴출되어 정치적으로는 패배자로서 민간을 유랑할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됩니다.

상당한 유학적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미미하지만 경제적 수단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때때로 권력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특정 지역을 암암리에 장악해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흉악한 범죄자를 사법적으로 징계하거나 불가피하게 폭력을 동원하여 해하였고 기존의 부패 권력을 제거하고 새로운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약간의 폭력을 동원하여) 간접적인 정의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협’은 상황판단도 꽤 빠른 편이라 특정 지역에서 사업을 시도해 보고 해당 사업이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민간에게 실패의 원인과 이유를 찬찬히 설명하고 다른 지방으로 떠나버리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민간은 이들이 신령한 용처럼 홀연히 나타났다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행태를 보고 현실적인 이익에 급급하지 않는 대범한 영웅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무인武人’이라 부르는 계층

때때로 이들이 사회적 실험에 성공하게 되면 곧바로 해당 지역에 정착하여 민간에 스며들었으며, 이전의 ‘협’으로서의 행동방식을 버리고 신분을 세탁하고 향신鄕紳으로 변신하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유형의 협은 일단 정치적 실험이 성공하면 곧바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거나 신분을 바꾸어 버렸지만, 여전히 대중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협의 신분을 유지하던 부류가 있었으니 이들은 흔히 권사拳師라고 불리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무인武人’이라 부르는 계층입니다.

전통적인 중국사회는 배덕과 불법을 법률에 의거하여 징벌하는 성문법成文法의 사회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도리라는 애매모호한 ‘상식’을 바탕으로 문제 쌍방을 중재仲裁하는 유형의 사회였습니다. 오늘날처럼 분쟁이 생기면 관청을 찾아가 분쟁의 유형을 규정하고 변호사와 검사와 같은 법률대리인을 통해 해결하기보다는 이익충돌을 막기위해 해당 업종 외부의 제3자에게 중재를 요구하는 근대 사회였죠. 따라서 업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중재를 통해 이익을 취하지 않으려는 청렴한 인덕을 가진, 일반적인 도리를 따져 사태를 판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관우금장도(關羽擒將圖)<출처:더위키>

사안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따져 조사하고 심사하기에는 분쟁 당사자들의 입장이 너무 상이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결과를 중재하여야 했으며 양자 모두 조금씩 손해를 보고 너무 피해를 입지 않을만한 중간적인 결과를 내는 것을 표준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자 분쟁의 쌍방은 서로 양보할 정도를 미리 생각하되 체면이 과도하게 깎이지 않을 정도로 합의를 보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쌍방의 중재안을 접수한 중재인은 서로의 명예를 존중하면서 중도적인 판결을 내립니다. 1920년대에 들어서자 남경정부는 중재 전문의 권사 조직 방회幇會에 분쟁 조정을 위임하였고, 방회의 수장인 두월생杜月笙은 매일 차서茶敍, 즉 차를 마시며 분쟁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에 예닐곱 차례의 담판에의 참석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권사가 사회질서를 담당하는 이러한 전통은 이후 수십 년을 넘도록 전승되어 1980년대의 북경과 천진에서도 여전히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권사(무인) 조직인 방회에게 찾아가 상담하는 관례를 따르고 있었기에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은 무인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방회는 분쟁이 발생하면 흥분하여 자기 입장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였고, 당장이라도 칼부림으로 보복하려는 사람은 무인들의 온화하지만 무거운 권위에 눌려 평화적인 해결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폭력이 직접적으로 동원되지는 않더라도 누가 보아도 방회의 중재 결정을 따르지 않으면 폭력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무도를 수련하는 협俠은 나날이 서양화되는 중국 사회에서도 규구規矩(규칙)을 준수하는 모범이었으며, 화려했던 과거의 무림의 영광은 모두 사그러들었지만, 오직 협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죠.

예를 중시하여 서로 만나면 큰절을 하는 등 청조淸朝 이전의 당송唐宋대의 무인간의 예절 양식을 고수하였던 이유도 분쟁중재자로 전락한 무인의 위상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중국에서는 상호간에 무릎 꿇는 예절이 없었습니다.(中華無跪坐) 무릎 꿇는 예절을 통해 모방하려는 양식은 당송唐宋 대에서 바닥에 방석을 놓고 앉는 예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좌의 형식과는 좀 달라 무릎을 앞으로 하여 가부좌를 틀었으며 두 무릎을 모두 꿇고 모으지 않았습니다. 가부좌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이면 상대에 대한 예禮의 행사였으며, 특히 방문한 손님의 신분이 높으면 보다 깊이 엎드려서 머리를 바닥에 살짝 대었습니다. 이 경우에만 두 무릎을 모두 꿇어야 했죠.

일본 영화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만춘晩春’의 오프닝에서는 가족 모임을 위해 한 자리에 앉아 좌례를 취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중국인들은 이 장면에서 자신들이 오래전에 버렸던 예절의 본모습을 확인하고 당황했다고 합니다. 당송 대의 중국의 예절 형식이 일본 현대 사회에 아직 남아있다니…
명明대에는 실내 생활에서 탁자와 의자의 사용이 유행하여 더이상 바닥에 자리를 깔지 않기 시작했고, 일상생활 중에 두 무릎을 모두 꿇는 습관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자에 대해 제사지내거나 가문의 조상에 대한 제사에서는 두 무릎을 모두 꿇었는데, 이 습관 역시 새롭게 정좌를 하는 양식이 개발된 것이 아니라 당송 대에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의자나 탁자를 사용하지 않고 방석을 놓고 앉는 옛날 모습을 모방한 사례였습니다.

공자에 대한 봉공 제사의식(출처:오마이뉴스)

명대에는 어떤 상황에서건 서 있거나 의자에 앉는 습관이 정착이 되어, 제사를 위해 앉을 때에는 특히 정좌를 하는, 서호봉의 표현을 빌자면 ‘기괴한’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공자의 제사가 아니면 정좌를 하지 않아 명대 이후로는 백성이 관원이나 윗어른에게 무릎을 꿇는 습관을 오히려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공부자孔夫子 이외의 사람에게 필요 이상이 존중이 공평한 정치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던 거죠. 감찰기구는 정좌를 대한 관원을 조사하여 처벌하는 법도 제정하였는데, 역으로 백성들은 폭정을 하는 관리나 권위적인 관원에게 일부로 정좌를 하여 ‘반항’의식을 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무릎 꿇지 못하게 가로막는 예절이 존중의
표현으로 인식되기 시작

정좌를 하려는 상대에게 사양하면서 무릎 꿇지 못하게 가로막는 예절이 존중의 표현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협은 민간에 잠복해 들어가 줄곧 오랑캐의 나라인 청에 반항하고 명을 회복하기 위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중화민국시대의 무인은 명대 군관의 후계자로서의 신분을 계승하였습니다. 이들은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명의 군례軍禮를 유지하여 상호간에 예를 행하는 방식이 군대의 예와 동일했습니다. 군인은 몸에 갑옷을 입고 머리에 투구를 쓰고 있었기에 허리를 굽혀 절하거나 정좌를 하고 이마를 땅에 접촉하는 예를 불편하다고 생각하여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읍揖하는 예절이 만들어 졌습니다.

중국의 전통예절

두 손을 모으는 제스츄어를 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목례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좌의 예가 입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와중에 명대 이후의 간략한 군대 예절을 계승하던 무인들은 중화민국 이후의 현대 사회에 들어 돌연 무릎 꿇는 정좌의 예절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서호봉은 ‘마치 수재秀才가 변발辮髮을 보존하는 것과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협으로서의 무인이 자신을 낮추어 겸손과 배려를 표현함으로써 무도가 가지는 과거의 가치를 되살리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청말과 중화민국의 나이 많은 수재는 장례식에 제문을 쓰는 일이 업이었습니다만, 업계 경쟁이 심해지자 변발을 하지 않으면 일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수재라 하더라도 변발이 아니면 서예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라죠. 변발을 자른 젊은 중국인들도 부모의 장례식과 제사에는 다시 변발을 올렸다고 합니다.)

좌례가 무도의 전통적 가치를 형식으로
새롭게 재생시키는 ‘현대적 시도’

협으로서의 무인들이 상호간에 정좌 자세에서 예를 취하는 양식은 사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일종의 시각적 시위가 되겠습니다만, 형상形象이 전통적이어야만 내용의 가치도 표현하기가 수월했을 겁니다. 정좌와 좌례는 구시대의 유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유적’을 행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회는 신뢰하고 복종하는 힘을 느끼고 있엇습니다. ‘무인이 세상 형편을 살펴 보니, 오랜 세월 동안 새로워지기를 희망하였지만, 이미 바로잡기 어려워졌고, 마음 속에는 새로이 버림받은 괴로움만 생기느니라.’

오늘날의 가치의 상실을 슬퍼하는 협으로서의 무인이 오래된 가치의 부흥復興을 몸으로 체현體現하려는 형식으로서의 좌례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키도는 타무도와는 달리 좌례로 시작하여 좌례로 종료되는 계고(稽古)를 수련의 도구로 삼는 체계입니다. 해석하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서호봉은 좌례가 무도의 전통적 가치를 형식으로 새롭게 재생시키는 ‘현대적 시도’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좌례를 통해 ‘어떤 가치’를 되새기려는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이 ‘형식’이 문자그대로 ‘형식’ 이상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이키도 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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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윤준환 편집장
대한합기도회 사무국장 및 대한합기도회 중앙도장 도장장 2013년 러시아 월드컴벳게임즈 한국대표로 참가 세계본부도장에서 내제자 생활을 했음 ※ 중앙도장 위치 ※ - 서울시 동작구 사당로 28길 6 (3층) - 4.7호선 총신대입구(이수)역 9번출구 도보 3분거리 - 수련문의 : 02 - 3444 -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