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키도와 하카마 -양승렬 칼럼

아이키도는 하카마라고 부르는 하의를 도복으로 입습니다. 하카마는 태권도나 유도에서 사용하는 익숙한 모습의 도복과 많이 다릅니다. 얼핏 보면 치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통이 큰 바지입니다. 우리의 한복처럼 하카마는 일본의 전통 복장 중에 하나입니다. 일본의 무사들은 허리에 허리 받침대인 요판이 있는 하카마를 입었습니다.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무사들의 전통 무도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일본에서는 아이키도 외에도 검도와 궁도 등에서 하카마를 입습니다.

하카마의 넓은 통은 많은 주름으로 만들어집니다. 앞에는 다섯 줄, 뒤에는 두 줄로 만들어진 주름이 특징입니다. 앞쪽의 다섯 주름은 인, 의, 예, 지, 신을 뒤쪽의 두 주름은 충과 효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 의, 예, 지, 신은 오상(五常)이라고 하는데, 충, 효와 함께 유교의 기본 윤리로 널리 알려진 개념입니다. 옷에도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를 적용시켰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의아합니다.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였고, 유교는 조선에서 더욱 널리 번성했기 때문입니다.

고려 이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탄생한 조선은 도성의 사대문(四大門)부터 유교의 기본 윤리를 적용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남대문의 본래 이름인 숭례문(崇禮門)은 예를 숭상한다는 뜻이고,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인이 흥하다는 의미이며, 지금은 사라진 서대문 돈의문(敦義門)은 의가 도탑다는 가치를 품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이처럼 건물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유교의 기본 윤리를 충실하게 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윤리를 전파하는 생활 문화가 사무라이의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사무라이를 군인과 비교하여 무조건적인 충성만 강요되었다고 예상한 사람들에게는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쓰는 단어를 살펴보면 그들 또한 얼마나 사물이나 행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높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술을 무예(武藝)로 부르는데 일본은 무도(武道)로 부릅니다. 예(藝)의 기본 의미는 기술과 예술입니다. 반면 도(道)에는 이치와 경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예(書藝)라고 부르는 붓글씨를 일본은 서도(書道)라고 칭합니다. 심지어 차를 마시는 행위에도 일정한 형식과 절차를 더해 다도(茶道)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 일상적이라는 의미로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흔한 일에도 도를 붙이면 무언가 특별하고 경건한 의미가 가미된 느낌이 듭니다.

호사카 유지 저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

그렇다면 과연 유교의 기본 윤리는 언제부터 사무라이의 나라에 전파된 것일까요?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라는 책을 쓴 호사카 유지 교수에 의하면, 본래 일본에는 유교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이전에 『손자병법』이 지침서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손자병법』의 본래 이름은 『손자』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손무가 쓴 책입니다. 전쟁을 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기에 보통 『손자병법』으로 불립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구절이 유명합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기 전까지 오랜 기간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1192년부터 왕을 대신하여 쇼군(將軍 장군)이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하는 막부 시대가 열리자 일본 전역은 본격적으로 사무라이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각 지역의 영주였던 다이묘(大名)들은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손자병법』이나 『삼략』과 같은 중국의 병법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내전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힘이 약해지던 시기에 정점을 찍게 되는데, 1467년부터 1590년까지 무려 123년 동안 전쟁이 이어지는 전국시대(戰國時代)가 펼쳐졌습니다. 반면 통일이 된 이후 1603년부터 시작된 에도시대에는 오랜 시간의 내전이 사라지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때 도쿠가와 막부는 관학으로 유교의 성리학을 채택하였습니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한 사회적 윤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무사 계급은 윤리적인 충성 의식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군과 가신의 관계가 의리나 신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약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귀족을 경호하는 사무라이

근래에는 일본의 무사와 사무라이를 같은 뜻으로도 사용하지만, 본래 사무라이는 귀족의 경호원이나 용병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를 뜻하는 한자 시(侍)에는 ‘모시다’, ‘받들다’, ‘시중들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9세기에서 10세기 경에 출현했다고 알려진 사무라이는 무신 정권인 막부 시대가 펼쳐지자 자연스레 신분이 높아졌습니다. 사무라이가 높은 신분을 얻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공을 세워서 그 대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귀족이나 영주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실력을 가진 무사가 필요했고, 사무라이는 출세를 위해 주군이 필요했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주군과 계약에 의해 맺어지는 사무라이의 입장에서는 배반이 비겁하다거나 주군과 생사를 같이 한다는 생각이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사무라이는 주군을 바꾸거나 다른 주군을 모실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며, 부자나 형제가 다른 주군을 섬겨 서로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나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 중에 하나는 일본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과 보상에 익숙한 사무라이들의 관심을 국외로 돌리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강항 선생(사진출처:오마이뉴스)

성리학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도 전쟁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 시기가 임진왜란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에게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의 선비들이 일본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일본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지식을 전파한 대표적인 인물이 강항입니다. 그는 뜻을 함께한 친인척들과 이순신의 진영으로 합류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일본군에게 붙잡혔습니다. 포로가 되기 싫어서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일본군이 건져내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강항의 복장을 보고 관원이라고 판단하여 자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강항은 일본에서 요시다 소준과 후지와라 세이카 같은 지식인들에게 성리학을 전파했습니다. 강항에게 제대로 된 학문을 배운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 성리학의 선구자가 되어 계통을 만들었습니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은 에도 막부를 세운 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부터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까지 학문을 가르치면서 막부의 관료로도 활약했습니다. 결국 강항의 학문이 쇼군에게 전파되면서 성리학이 관학으로 자리 잡게 된 셈입니다. 하야시 라잔의 제자였던 야마가 소코는 무사들이 지켜야 할 유교적 윤리를 사도(士道)로 정의하며 전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사무라이들에게 인, 충, 효 등의 윤리가 규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사도는 1900년에 니토베 이자조가 쓴 『무사도(武士道)』에서 의미가 확장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퍼져나갔습니다.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의 정신을 『무사도』로 압축하여 영문으로 출간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을 졸업한 유학파로 영어에 능통했습니다. 니토베 이나조는 어느 날 일본에 종교 교육이 없다면 어떻게 도덕 교육을 하느냐는 벨기에 대학 라블레이 교수의 질문에 『무사도』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사도』는 청일전쟁 이후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된 일본의 흐름과 맞물려 서양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때부터 선비 정신을 계승한 무사도가 사무라이 정신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서양에 전파되었고 일본식 영문 표기인 Bushido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무사도』가 사무라이 정신을 미화한 면이 많다고 지적을 합니다. 그는 적의 허점을 찌르는 전략이나 침략을 선한 행위로 여기는 특징 등을 책에 소개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일본의 정신으로 정립된 무사도는 일본이 제국주의로 성장하면서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한 의지로 다져나가야 할 사회적 윤리의 대표적인 왜곡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아이키도는 독특한 무술입니다. 승부를 가리는 대련이나 시합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무술은 상대방을 향한 강력한 타격이나 꼼짝 못하게 만드는 기술을 내세운 공격의 우월성을 자랑합니다. 이런 무술들은 유단자들의 시범도 치명적인 공격성을 위주로 선보입니다. 그러나 아이키도는 다릅니다. 아이키도는 연무를 보면 부드러움으로 가득합니다. 고수의 시범은 주로 반격입니다. 먼저 공격하지 않습니다. 반격에는 강압적이지 않은 반듯함과 상대방의 수준을 고려한 배려의 몸짓이 녹아 있습니다. 기술을 거는 사람은 사각을 향해 사뿐히 움직이고 기술을 받는 사람의 수신은 매끄럽습니다. 기술을 걸거나 받는 동작은 모두 둥그런 원의 형태를 닮았습니다.

타나베시 기념관에 있는 창시자 동상

21세기 지성인들에게 어울리는 진정한 무도(武道)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이키도가 가장 알맞은 답으로 생각됩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생전에 전쟁을 반대하며 평화의 무술로 아이키도를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이키도는 승패가 없는 독보적인 무술로 자리를 잡으며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만약 세계의 평화를 희망하는 21세기 지성인들에게 어울리는 진정한 무도(武道)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이키도가 가장 알맞은 답으로 생각됩니다.

창시자가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수련 방식 그리고 상급자와 초급자가 서로 존중하며 도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 녹아 있는 무술이 아이키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카마의 주름에 부여한 인, 의, 예, 지, 신도 배려와 존중하는 마음이 바탕에 없으면 그저 허울일 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하카마의 주름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에 가까운 진정한 무도(武道)가 곧 아이키도의 길과 닮아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글: 신촌도장 양승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