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의 무도를 넓히기 위해 -고바야시 야스오 총사범

신문과 TV 뉴스에서는 전쟁이라는 말이 튀어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공습, 폭격, 포격 그리고 주민 살해라는 말도 들립니다. 평화로운 일본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낌과 동시에 전란에 휘말린 주민에게 동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1936년에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때 도쿄에서 공습을 경험했습니다. 일본군은 1941년 12월 8일에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여 미국과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전쟁 초기엔 일본군이 우세했습니다만 1944년 11월 24일 미국의 B-29 폭격기가 도쿄를 공습했습니다. 그 이후 도쿄 공습은 무려 122회에 이릅니다.

내제자 시절 프랑스에서 중앙 안드레 사범과 함께한 고바야시 야스오 총사범

일본의 집은 목조 주택이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처럼 지하실이 없습니다. 보도에 방공호를 파고 공습이 오면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미군은 일본 가옥을 불태우기 위해 소이탄을 많이 떨어뜨렸습니다. 밤에는 소이탄이 불꽃처럼 불타면서 떨어지던 모습을 저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본 각지의 대도시는 미국의 공습으로 불타 허허벌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1945년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 이후 제가 다니던 치요다구 후지미 초등학교는 전원이 후지산 기슭의 후지요시다 시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지요시다 시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콩이 70% 섞인 밥에 부족해도 더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자나 깨나 먹을 것만 생각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에 전쟁은 끝났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 서서 종전 방송을 들었습니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을 잃게 합니다. 적대시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잔학한 짓을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기 때문에 라디오에서 들리는 내용은 하나도 이해를 못했습니다. 선생님과 어른들이 울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인은 30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흔히 사람 한 명의 목숨은 지구보다 무겁다고 말합니다. 정말 전쟁은 하면 안 됩니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을 잃게 합니다. 적대시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잔학한 짓을 합니다.

이번 우크라이나에서도 러시아군이 물러난 뒤에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시체가 많이 있었다는 걸 듣고 정말 슬펐습니다.
저희 집은 도쿄 구단사카 위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야스쿠니 거리를 끼고 집 앞에는 파출소가 있고 한가할 때는 파출소의 순경 아저씨가 가게에 자주 들렀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유도 유단자였는데 저에게 유도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유도의 총본산 강도관이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스이도바시역 옆에 있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시작하면 그만두기 없기라는 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계속했습니다. 유도로 알게 된 친구가 거합도 연맹 회장이었던 단자키 사범의 아들인데 고등학교 3학년 가을에 <합기도>라는 무도가 있으니까 견학 가보자고 꼬드겼습니다.

저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합기도 본부도장에 입회하여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아침 수련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수련을 하고 대학에 다니며 밤에는 유도를 수련하는 생활을 얼마간 했습니다. 본부도장은 전쟁의 불길을 피해 살아남은 목조 도장이었습니다.
도장 자체의 넓이는 다다미 50장 정도였습니다만 뒤쪽 부분은 전쟁으로 집을 잃은 두 가족이 눌러 앉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는 일부러 벽에 부딪혀 빨리 나가도록 한 일도 있었습니다.

1950년 타무라 노부요시 사범(왼쪽) 노로 마사미치 사범(중앙에서 오른쪽) 중앙에 고바야시 야스오 총사범

도장에는 눌러 살면서 대학에 다니거나 일하러 다니는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저에게 좋은 자극과 공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합기도는 시합이 없어 승부에 얽매이지 않고 수련 그 자체가 수행이기에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데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당시엔 일상생활에서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만 도장에서는 프랑스인, 미국인 내제자와 접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대학 4년간은 다니던 대학에 합기도부를 만들기도 하는 등 합기도 삼매에 빠져 지내고 대학 졸업 후에는 본부도장 지도부에 들어갔습니다. 16년간 본부도장 지도부원으로 본부도장과 NHK 등 몇 개의 회사 합기도부에서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4월에 합기도 고바야시 도장을 열었습니다. 고바야시 도장은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합기도를” 기본으로 활동하여 햇수로 55년이 됩니다. 현재는 세계 40개 국과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합기도 발전을 위한 장학금 제도인 “무스비 기금”으로 해외나 국내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상대와 맞추는 것이 수행입니다. 무도에서 이런 수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합기도 뿐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도장 유지가 어려운 해외 8개 단체에 자금 지원을 했습니다. 합기도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화의 무도>라고 하셨습니다. 수련법도 서로 던지고 기술을 받아주며 하는 수련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와 맞추는 것이 수행입니다. 무도에서 이런 수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합기도뿐입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님이 제창하신 <화의 무도>를 넓히기 위해 앞으로도 합기도 고바야시 도장은 노력해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협력을 부탁합니다.

글: 고뱌야시 야스오 총사범 (합기도 고바야시도장 신문 제70호 게재)
번역: 김의수 3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