合氣道 쟁점 묻고 답하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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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Hapkido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최용술이 일본에서 대동류유술을 배운 뒤 해방과 함께 귀국해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Hapkido의 시초로 보지 않습니까.

 

A : 그렇습니다. 최용술이 “나는 다케다에게 대동류유술을 배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Q : 쪼개서 질문하죠. 최용술은 다케다의 양자였습니까?

 

A : 확실하지 않습니다.

 


Q : 최용술은 다케다의 제자였습니까?

 

A : 확실하지 않습니다.

 


Q : 최용술이 다케다에게 훗날 合氣道를 창시하는 우에시바를 소개했습니까?

 

A : 확실하지 않습니다.

 


Q : 다케다가 최용술에게 대동류유술 종가를 물려주었습니까?

 

A : 확실하지 않습니다.

 


Q :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 Hapkido계에서는 최용술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간 결과라는 전제를 달고 말씀드립니다.

 

아직까지 ‘최용술과 다케다’, ‘최용술과 대동류유술’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최용술이 북해도 오타루(小樽)에 살았다는 일본 주민표 말고는 의미 있는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북해도에 살았다는 것이 다케다 밑에서 대동류를 배웠다거나 다케다에게 우에시바를 소개했다는 직접 증거는 아니지요.*

* 우에시바가 북해도 개척을 위해 북해도로 갔을 때 다케다는 이미 북해도에서 지내고 있었다. 북해도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고 우에시바가 다케다에게 대동류유술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1919년, 우에시바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북해도의 집과 가재도구를 다케다에게 넘기고 길을 떠났다.

 


Q :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A : 최용술이 해방 후에 국내에서 활동한 기록은 명확합니다. 사람들의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반면 그의 일본 생활은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용술의 일본 수도기(修道記)’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특정한 사건을 두고 세부적인 묘사가 다르기도 하고, 시기나 지명(地名), 인물의 이름이 조금씩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핵심 주제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분량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무튼 최용술의 일본 수도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다. 양친과 친분이 있던 일본인 부부가 귀국할 때 최용술을 규슈(九州)로 데려갔다.

– 일본인 부부가 최용술을 평소 알던 절(규슈 소재)에 의탁했다. 최용술은 절에서 나와 배를 타고 나라(奈良)까지 갔다. 나라(奈良)에 있던 또 다른 절의 주지스님이 최용술을 거두었다. 그곳에서 다케다를 처음 만났다(처음에 들어간, 규슈에 있던 절에서 다케다를 만났다는 설도 있음. 최용술을 다케다에게 소개한 사람 이름도 기록에 따라 다름).

* 양쪽 다 같은 사람(김정윤)이 기록한 것이다. 전자(다케다를 나라에서 만남)는 2010년 『大東武』, 후자(타케다를 규슈에서 만남)는 1962년 『合氣術』에 나오는 내용이다.

– 다케다의 양자가 되었다(양자까지는 아니고 문하생이었다는 설도 있음).

– 최용술을 포함한 다케다의 문하생 5명(계승자 후보)이 입산 수련*을 했다. 황명(皇命)**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최용술이 대동류 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계승이 묵시적으로, 아주 은밀히 이루어져서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 『合氣術』에는 신슈산(信洲山)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지도에는 없는 산이다. 최근 자료에서 추정하는 산은 미즈가키산(瑞牆山)인데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 Hapkido 자료에 적힌 표현을 그대로 썼다.

– 산에서 내려온 뒤에는 다케다의 순회 지도에 함께했다. 다케다가 전반적인 지침을 주면 그에 따라서 최용술이 대신 지도했다. 우에시바도 최용술이 같은 방법으로 지도했다. 최용술은 다케다를 따라 황궁*에 가서 시범(연무)을 보이기도 했다.

* Hapkido 자료에 적힌 표현을 그대로 썼다.

– 다케다의 노년에는 북해도에 도장을 열어 대동류를 지도했다.

– 해방 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고향(충북 영동)으로 가던 중 청도 쯤에서 짐을 잃어버렸다. 짐에는 대동류 증서, 일본에서 찍은 사진, 천황*과 다케다가 준 일본도(日本刀)처럼 일본 생활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 Hapkido 자료에 적힌 표현을 그대로 썼다.

– 돈까지 함께 잃어버린 최용술은 발길을 돌려 대구에 정착했다.

 

상황을 그려볼까요.

 

해방 후 최용술이 대구에 나타났습니다. 강한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던 그의 곁으로 사람들이 모입니다. 지도를 청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도장도 열었습니다. 제자들이 최용술에게 “선생님의 무도는 무엇입니까. 어느 분에게 배우셨는지요.”라고 물었겠죠. 여기에 최용술은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도를 배웠다.’며 답했을 것입니다. 최용술은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본인이 다케다에게 배웠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1962년에 출간된 『合氣術』 말미에는 ‘최용술의 일본 수도기’가 수록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최용술이 했던 말을 정리한 것일 테지요.

 

최용술의 일본 수도기는 1962년 최초로 문서화 된 이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이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최용술에게 배운 사람들이 그의 수도기에 약간의 윤색, 각색, 과장을 더했을지 모를 일이고, 어쩌면 최용술도 옛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서 일본 생활을 말할 때마다 구체적인 내용이 살짝 달라졌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최용술이 본인 대에서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고 나서 보니 논란거리만 남았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최용술의 일본 생활을 추적했더니 정황이며, 지명이며, 인물이며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또는 아예 확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학자나 기자들이 모두 같은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현재 그런 상황입니다.

* 지면 관계상 모두 서술할 수 없어 자료를 몇 가지만 소개한다. 최용술의 행적을 추적했지만 결국 실패하거나 작은 단서를 찾는 데 그쳤을 뿐, 최용술의 생전 진술이 사실인지는 밝히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최용술이 일본에서 이렇게 살았다’라고 단정하는 자료 말고,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자료를 찾아보라. 같은 결론이다.

– 후쿠오카 쇼오, 「최용술과 대동류합기유술-대동류와 한국합기도의 의외의 접점은?」, 『MARS(2001년 9·10월호)』, 2001, pp.74~78.

– 김이수, 「최용술의 일본 수련기에 대한 再考」, 『한국체육학회지』, 2008년, 제47권 제6호, pp.27~37.

– 김정윤(필명 : 장군), 『大東武』, 밝터, 2010.

– 김정환, 앞의 논문.

 


Q : ‘일본에서 최용술의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 최용술의 흔적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A : 그렇습니다. ‘일본인들이 최용술의 기록을 지웠다.’, ‘최용술을 알 만한 사람들이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일본인들이 일본 무도 대동류가 한국인에게 전승되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정윤은 ①1996년 일본을 답사할 때 찾은 자료 속에 다케다와 제자들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에 지워진 인물이 있었다. 최용술이 분명했다. 최용술은 체형이 특이해서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진에서 최용술을 지움으로써 대동류(김정윤은 ‘대동무’라고 씀) 종가의 근거를 잃고 말았다, ②일본인들이 다케다에게 우에시바를 소개한 사람을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 최용술의 일본 이름)에서 요시다 코타로(吉田幸太郞)로 바꿔 놓았다, ③한국에서 다케다家에 연락했을 때는 ‘최용술의 기록을 찾았다’, ‘최용술을 안다’고 했는데 막상 일본으로 가 보면 관계자들이 입장을 번복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최용술이 정말로 다케다에게 대동류유술을 배웠는지 잘 모릅니다.

다케다가 정말로 최용술에게, 그것도 은밀하게 대동류유술의 종가를 물려주었는지 잘 모릅니다.*

* 다케다가 사망한 뒤 대동류 종가는 다케다의 뛰어난 제자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1902~1998)가 이었다<다케다는 생전에 셋째 아들 다케다 도키무네(武田時宗, 1916~1993)를 후계로 생각하고 준비를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케다 도키무네가 바로 종가를 잇기에는 너무 어렸다.>. 1956년 사가와는 다케다 도키무네에게 종가를 양도한다.

최용술이 정말로 다케다에게 우에시바를 천거했고, 다케다를 대신해서 우에시바를 지도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최용술은 그렇다고 했지만 확인이 안 됩니다. 그러니 드러난 자료를 가지고 판단할 뿐입니다.

 

그리고 대동류유술 관계자들이 조직적으로 최용술의 흔적을 지워버렸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김정윤의 말이 진실이라면 대동류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큰 사건입니다. 하지만 진실이라 해도 대동류 측에서 양심고백이 나오지 않는 한 ‘대동류유술의 계승자는 최용술’이라는 주장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이 아니라면 대동류 지도자와 수련생에게 큰 결례를 범한 것이 되지요.

 

따라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고 상호 교차해서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와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최용술이 가르친 무도의 뿌리는 대동류유술’이라거나, ‘최용술은 다케다의 제자, 더 나아가 후계자’라는 주장을 무작정 따르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최용술의 일본 수도기’를 무조건 진실로 믿으며 소개하고 인용했을 Hapkido인들에게 이렇게 물음표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Q : ‘Hapkido는 대동류유술이 한국화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A : 최근 Hapkido계의 연구 경향이 그렇습니다. Hapkido인들 사이에서도 견해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질문에 답하자면,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Hapkido는 대동류에서 온 것이 맞다, 아니다’를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Hapkido계에서 일반인에게 대동류의 국내 유입설을 납득시키려면 앞으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Hapkido인들이 Hapkido와 대동류유술을 연결하는 이유는 대표적으로 두 사람의 존재 때문인데요. 한 사람은 최용술, 다른 한 사람은 장인목(1915~2004)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최용술과 대동류유술의 관계는 확인되지 않은, 막연한 가능성만 있는 상태이죠.

 

다른 한 사람 장인목은 1927년*에 일본 북해도로 건너갔고, 1935년 대동류유술에 입문해 1938년에는 비전목록을 받았습니다. 증서가 있고, 대동류 측에서도 이 사실을 인정했습다. 장인목은 해방 후 귀국해서 Hapkido라는 이름 아래에서 대동류유술을 지도합니다. 장인목은 1966년경(추정) 대구YMCA에서 Hapkido반을 운영했다고 하는군요. 1968년에도 이 Hapkido반이 계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수련생은 장인목이 하카마를 입고, 대동류 비전목록의 순서대로 기술을 지도했다고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장인목은 1971년에 자기 도장(合氣道 國武館)을 내면서부터 하카마를 입지 않고, 발차기 같은 다른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71년에는 기도회 이사에 재선임 되었다는 기록도 확인됩니다.

* 1928년이라는 설도 있음

 

여기까지 정리하면 ‘①Hapkido의 시조로 보는 최용술이 대동류유술을 배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②現Hapkido계의 원로 중에는 대동류유술 비전목록 보유자 장인목이라는 사람도 있었다.’라는 정도랄까요.

 

‘Hapkido는 대동류에서 왔다’고 하기에는 둘 사이의 연관성이 많이 느슨해 보입니다. Hapkido계에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Hapkido와 대동류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려면 Hapkido의 기술과 정신에는 대동류의 풍격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는지에 대해서도 대중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Hapkido가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있건 ‘한국화 된 무술’이라는 표현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