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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禮式과 탕진蕩盡 (2-2) - 조현일 에세이

  • 조현일 기자
  • 입력 2024.05.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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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을 통해 여러번 소개한 바 있는 철학자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 삶의 정처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한병철/ 전대호 역/ 김영사/ 2018)'에서 예禮와 식式을 논하며 현대문명의 허무를 비판합니다. 한병철이 논하는 리추얼은 공동체가 보유한 가치와 질서를 반영하고 전승하는 상징적 행위를 의미하는바, 저는 이 '리추얼ritual'이라는 용어를 동양문화권의 '예식' 개념 중 '식'으로 치환하겠습니다. 동양학자나 한문학자께서는 이러한 단순 치환을 어불성설이라 비난하시겠지만, 이 분야에 지식이 일천한 저는 무례하고 과감하며 거칠게 대치할 수 있습니다. 너그럽게 배려해 주시길.


한병철은 '식式'이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으나 소통만이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대조적으로 '소통이 필요없는 공동체'를 발생시킨다고 설명합니다. '식'의 본질은 상징적인 지각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옛 중국에서 '식'은 우호적인 주인과 우호적인 손님 사이의 환대의 증명이었습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둘로 쪼갠 점토판을 보여주며 자신이 반을 가지고 손님에게 반을 쥐어주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우호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증표로 삼아, 다음 세대의 후손들이 서로 만나더라도 점토판의 쪼개진 부분을 맞추어 서로의 태도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서로를 확인하는 행위가 상형한자의 형태로 '식'이 되었죠.


 

건배(출처: 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건배(출처: 네이버 블로그 이미지)

 


서양에서는 서먹한 상대와 맥주잔을 부딪쳐 서로의 술이 섞이게 만들어 서로의 술에 독을 타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건배'의 '식'이 있습니다. 그러니 넓은 의미로 보면 '식'은 서로간의 우호관계를 확인하는 행위라고도 일반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행위를 오랜 세월 반복하다보니 '식'은 상호간의 연대의 매체로 기능하는 상징으로 진화하게 되어 이 상징체계가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예'의 범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상당한 시간이 지나 '예식'은 상호 개인의 관계의 범주에서 사회적 연대의 매체, 나아가 인간이 신 혹은 하늘과 우호와 연대를 확인하려는 상징적인 행위로 이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반복은 식의 본질적 특징입니다. 그러나 의미의 집약이 이루어진다는 맥락에서 식은 '루틴'과는 다르게 이해됩니다.


한병철은 특히 '반복을 특별하게 만들고 루틴화시키지 않도록 보호하는 리추얼(식式)의 집약성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에서 한병철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를 동원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반복과 기억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작용하는 동일한 운동이라고 보았습니다. 기억되는 대상은 이미 시간적으로 지나간 객체이며 '뒤를 향해 반복'됩니다. 반면에 진정한 반복은 '앞을 향해 기억'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알아보는 행위로서의 반복은 '맺음'의 형식을 띠게 됩니다. 즉, 과거와 미래가 생동하는 현재에 통합된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맺음' 형식으로서의 '다시 알아보기(혹은 재현representation, 혹은 재인식recognition)'의 행위가 '식'의 지속과 집약성을 창출합니다.


재인식으로서의 '다시 알아보는' 행위는 시간을 멈추게 만듭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오직 새로움에 대해서만 싫증이 날 수 있으며, 옛 기억에 대해서는 결코 싫증을 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기억은 '행복으로 배부르게 해주는, 일용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떠올리는 주체에게 행복을 선사하고 반복은 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대상을 상상하게 만들며 자신을 기만하지 않음으로써 행복을 선사합니다. 자기기만은 반복에 싫증을 나게 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Die Wiederholung', Hamburg, 1961, 7) 한병철은 '식'이 체화의 과정이자 몸-연출 행위라고도 말합니다.


공동체에서 소통되는 질서와 가치는 정신 뿐만아니라 몸으로 경험되고 공고화됩니다. 질서와 가치가 '몸'에 '기입記入'되고 '내면화'되는 과정입니다. 이리하여 '식'은 개인 차원에서 체화된 앎과 기억이 되고 체화된 정체성이 되며, 개인 다수간에는 신체적 결합을 생성하고, 그리하여 이 개인들이 모여 '식'의 '몸-공동체'를 형성합니다. 한병철의 이러한 논의는 파편화되고 소외되는 디지털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논거가 됩니다. 디지털화는 공동체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탈신체화된 소통을 강요합니다. 완전한 타인들끼리의 디지털 커뮤니티나 SNS 상의 공동체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디지털로 소통하는 '우리는 공동체'라는 아름다운 환상을 가지게 만드는 네트워크… 이러한 신체적 자원이 깃들어 있지 않은 탈신체화된 '공동체'는 소통이 강화되면 될수록 연대가 약화되는 맹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을 통한 몸-공동체의 구성은 언제나 '느낌'을 동반하며
구성원은 누구도 고립된 개인으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모종의 커뮤니티에서 악성댓글이나 악의 넘치는 비방 메시지로 얼마나 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감정적인 폭력행위의 피해자로서 절망하고 패배감을 느끼며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지…  하지만 '식'을 통한 몸-공동체의 구성은 언제나 '느낌'을 동반하며 구성원은 누구도 고립된 개인으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장례'식'에서의 슬픔은 객관적인, 그리고 공동의 느낌입니다. 결혼'식'에서의 설렘과 흥분, 그리고 축하의 느낌은 하객 전체가 공유하는 즐거운 감정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공동의 느낌(희노애락)은 개인의 심리의 수준을 초월하여 감정의 주체를 공동체 그 자체로 느끼게 하며, 이러한 느낌이 공동체의 연대를 강화하는 아교阿膠로 작용합니다.

 


물론 디지털 공동체에서도 흥분과 슬픔의 감정은 네트워크의 특성에 힘입어 확산되고 공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감정은 고립된 개인의 상태로서 주도권을 쥐고 즉각적인 배출을 장려하고 요구합니다. 이성적인 판단과 감정적인 매개이기보다는 흥분의 매체이자 폭력적인 감정의 방아쇠로 작용하기 십상입니다. 이러한 흥분의 확산은 또다시 공동체의 연대를 흐뜨러트리는 악재로 작용하죠.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조르주 바타유Georges Albert Maurice Victor Bataille는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조한경 역/ 문예출판사/ 1999)에서 '놀이의 두 유형으로 '강한' 놀이와 '약한' 놀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약한 놀이만 인정될 뿐, 강한 놀이는 자본주의체제가 우리 삶에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의 시대에나 인정될 수 있는 '위험한 놀이'입니다.



강한 놀이는 목숨을 건 적극적인 유희 혹은 의식이지만 약한 놀이는 레저에 가까운, 스트레스 해소에 가까운 가벼운 놀이를 의미합니다. 바타유는 자본주의적 가치, 그리고 자본생산의 수단으로서의 인간의 실용적 가치가 지배적 원리가 된 오늘날의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약한 놀이만 인정될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생산수단으로서의 개인의 신체에 손상을 가할 수도 있는 '강한 놀이'는 기피대상이며 반대로 약한 놀이는 노동으로부터의 스트레스와 사회적 압력으로부터의 회복을 증진할 수 있기에 생산의 논리에 부합합니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강한 놀이는 노동 생산의 원리와 부합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체제가 우리 삶에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의 시대에나 인정될 수 있는 '위험한 놀이'입니다. 바타유는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이용대 역/ 한겨례출판사/ 2011)'에서 소개한 인도 퀼라카레Quilacare 지방의 '위험한 놀이'(리추얼)을 재인용합니다. '그 축제에서 칼리쿠트의 왕은 왕권과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그 축제의 명칭은 '위대한 희생'이었다. 그 축제는 12년마다 거행되었고 (…) 예식은 매우 화려하게 치러졌다. (…) 거기에는 4만 명 이상의 전사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 모여 있었다. (…)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왕이 검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크고 무거운 황금 사슬이 왕의 곁에 선 코끼리 위에 얹혔다. 이것이 신호였다. (…) 한 무리의 무장한 사람들이 꽃으로 치장하고 재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군중에서 떨어져나왔다. 그들은 방금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했고 이제 친구들로부터 마지막 축복과 작별의 인사를 받는다. 곧이어 그들은 창들의 대열을 따라 나아가며 좌우의 군인들을 때리고 찌른다. (…) 그들은 차례로 쓰러진다. (…) 자신의 겁 없는 용기와 검술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하여 그들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이어진 열흘의 축제에서 이와 똑같은 대단한 용기의 발휘, 똑같은 무용無用한 인명의 희생이 계속 새롭게 반복되었다.' (Georges Bataille, 'Die Aufhebung der Okonomie', Munchen, 2001, 312)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원시적 리추얼은 그저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그야말로 의미없는 죽음이 즐비한 위험한 놀이 혹은 '식'에서 인간의 신체는 '위대한 희생'이라는 기치 아래 발사된 총탄의 탄피처럼 헛되이 버려집니다. 하지만 바타유는 이러한 탕진蕩盡과 유희에서 삶의 진정한 본질(혹은 삶꼴)을 찾고 있습니다. 삶 그 자체를 신성시하며 신체를 노동과 생산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의례는 잔혹한 광기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생산이 희생보다 훨씬 의미있다는 이데올로기…



생산의 강박에 사로잡힌 사회는 삶의 집약으로서의 죽음으로 표현되는 '강한 놀이'에 접근할 방도를 찾지 못합니다. 물론 퀼라카레의 '탕진'에는 의미있는 생산(칼리쿠트 왕을 향한 칭송이나 찬양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을)보다는 원시적 희생이 즐비하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시각은 어디까지나 후기자본주의체제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하고 있다는 반박도 가능합니다. 생산이 희생보다 훨씬 의미있다는 이데올로기…

 


'희생'에 해당하는 라틴어 '사크리피키움Sacrificium'은 '신성神性의 산출'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신성에 다가갈 수 없으니 희생을 통해 인간계에서 신성을 생성하려는 눈물어린 발악이죠. 신성은 탈생산을 가리키며 무의미한 희생과 탕진에서 삶꼴을 추구하는 '가장 인간적인 발악'의 결과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놀이와 유희의 철학을 창시한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종인 역/ 연암서가/ 2018)'에서 원시 문화에서의 전쟁행위가 유희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하위징아는 심지어 오늘날의 전쟁 행위에서도 그 유산이 계승되어 전쟁을 치루는 엄격한 임전규칙이 존재하며, 이를 어길 시 전범재판에 회부하는 '놀이의 규칙' 엄수 관념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원시사회에서 과도한 폭력과 잔인한 살해행위들이 전쟁과 동반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전쟁을 치루던 당사자들은 이를 신성한 놀이의 영역에 위치시킨 사실도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싸움의 규칙이 명시된 엄숙한 협정문이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작성되었다. 대결의 시간과 장소가 그 협정문에 기록되었다. 모든 원거리 무기, 곧 투창, 활, 투석기는 금지되어야 했고, 오직 칼과 창으로만 승부를 내야 했다.'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1938, 97) 살상력이 필요 이상으로 강한 특정 무기의 금지뿐 아니라 전투가 벌어지는 시간 및 장소에 대한 합의도 원시 전쟁이 지닌 놀이의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禮)
예(禮)

 


전쟁터는 마치 연극 무대처럼 말뚝이나 개암나무 가지로 경계를 표시하였고, 바닥은 평평하게 다져서 전투하는 양편이 누구도 불리하지 않게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하위징아는 전쟁의 리추얼화가 일반적인 '윤리의 수준'을 대폭 향상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적으로 맞선 양편이 공손한 행동으로 예를 갖추고 인사를 교환하는 행위가 리추얼적 맞대결의 특징인데, 검술에서 서로에게 상호간의 예를 표현하고 승패를 판단하는 심판관에게 경의를 표하듯이, 이 특징은 상대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인격체로서 인정하는 관념과 태도를 전제합니다.


전쟁하는 양편은 상대에게 적개심을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러니컬하지만, 전투기술을 통해 상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전투가 끝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켜 서로의 무기와 전투기술을 찬양하고는 자신이 사용하였던 공격무기를 선물로 교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리추얼에는 강력한 형식(式)의 힘이 깃들어 있어서, 리추얼적 맞대결로서의 전쟁은 엄격한 규칙으로서의 형식을 마치 구속복처럼 폭력의 잔인함에 덧씌워 폭력의 강도를 제어합니다. 전쟁과 전투가 집단공동체간의 리추얼이라면, 개인간의 리추얼이라 할 수 있는 '결투duel'의 기원은 원시 사회에서의 사법 대결에서 유래한다고 봅니다. 원시사회에서 유래했더라도 16세기 프랑스까지도 결투의 사법적 의미는 이어졌으며, 사법 정의의 판단을 신의 영역이라 생각한 당시의 전사들은 결투의 승부를 신의 판결로 간주했습니다.


 

전쟁 출정에 앞서 생으로 의식을 하고 있는 新羅三郞源義光
전쟁터로 가기 전 생으로 의식을 하고 있는 新羅三郞源義光

 


결투에 개입하는 요소들을 '정의'의 의미인 디케Dike'와 숙명이나 우연 혹은 신의 섭리라는 의미의 '튀케tyche'의 융합적 관념이 결투의 승패를 가름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결백한 자 혹은 정의로운 자가 승리를 거뭐쥘 수 있다는 맹목적 신념…  결투에 임하는 전사는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결백과 정의를 호소해야 했기에 언제나 정갈한 몸가짐을 가져야 했고 특히 전투 직전에는 목욕재계하고 조상에게 임박한 결투를 예고하는 등 신성한 의식을 치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결투에 앞서 '명예법정'이 소집되었고 당사자들이 법정에 모여 민사재판과 다름없는 절차를 거치며 결투의 결과를 법원의 사법적 판단과 다르지 않다는 서약을 교황이 보는 앞에서 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결투를 치루는 양편은 서로 결투 조건을 교환하고 완벽한 대칭성이 확보된 이후에 결투를 개시하였죠.


영화 '존윅4'의 마지막 신에서는 존 윅과 빈센트 드 그라몽 후작 간의 결투가 등장합니다만, 그들이 결투를 결정하는 과정에 심판관이 제시한 트럼프 패를 뒤집으며 시간과 장소, 그리고 무기를 상호간의 합의하에 결정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칼에 능한 존윅이었지만 그라몽 후작이 끝수가 높은 트럼프 패를 잡았기에 무기는 피스톨로 결정되죠. 더우기 그라몽 후작은 자신을 대리하여 결투에 임할 '흑기사'를 지명하기도 합니다. 결투의 목적이 상대에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존윅의 종신 고용 계약을 해지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총탄을 발사하는가의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존윅 한 장면
영화 '존윅' 한 장면

 


'결투가 벌어지는 장소는 일종의 놀이터이다. 무기들은 동일해야 하며, 신호에 따라 싸움을 시작하고 종결해야 한다. 사격이나 격돌의 횟수는 미리 정해진다.'('Homo Ludens', 1938, 95) 만일 사법적 정의를 가르는 결투 요청을 거부하는 당사자는 몰염치하다고 간주되어 관직과 경제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파문되거나 호적에서 퇴출됩니다. 즉 결투는 신에게 의탁하여 정의를 판단하고 자신의 명예를 목숨으로 지키는 의식인 것입니다. 설사 결투에서 패배한 경우에도 비록 사법적 손해배상이 요구된다 하더라도 패배자의 명예는 여전히 유지됩니다.


군사적 명예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중세 기사들의 명예관은, 자신이 위험에 뛰어들지 않으면서, 즉 자신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권리를 상대에게 주지 않고 적을 공격하는 행위는 명예롭지 않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칼날에 독을 바르거나 음식에 독을 타 상대를 불리하게 만드는 행위는 대칭성과 상호성을 무시한 음흉한 행위로서 기사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비열한 태도입니다. 상대가 칼을 쥐고 있다면 활의 사용은 비난받아 마땅하며, 이러한 비대칭적인 무기의 제한의 규정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왔습니다.


프로이센의 군인이자 군사학자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Vom Kriege/ 류제승 역/ 책세상/ 1998)'에서 전쟁을 리추얼적 대결로 정의하면서, 이를 질서가 잡혀진 규칙에 따르는 맞대결과 다르지 않다고 규정합니다. 클라우제비츠가 근대전에서 또다시 오랜 역사를 가지는 전쟁의 새로운 정의를 내세운 이유는 '총력전'이라는 왜곡된 관념하에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고 규칙없이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오늘날의 전쟁 양태를 '학살'로 규정하고 이를 비폭력수단으로서의 정치가 개입하여, 전쟁의 전후에 적절한 수준의 폭력수단을 의식적으로 행하기를 종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쟁의 비대칭성이 범죄로 간주되는 오늘날의 전쟁법



주권을 상실한 노예가 전쟁터에 끌려가 학살되는 상황이 아닌 주권적인 시민이 신 앞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적/도덕적 동등을 반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꿈꾸고 있었던 겁니다. 전쟁의 비대칭성이 범죄로 간주되는 오늘날의 전쟁법의 설립에 클라우제비츠가 기여한 바를 높이 사고 싶습니다.

 


독일의 법학자인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클라우제비츠의 철학적 사명을 계승합니다. '전쟁하는 양편이 전선에서 마주한 상황은 양편의 법적 동등성, 더 나아가 도덕적 동등성을 반영한다. 상대는 적(합법적인 적)으로서 명시적으로 인정받는다. (…) 위상학적 의미의 우위, 곧 '상대 위에 있음'은 적에 대한 다른 정신적 태도를 발생시킨다.


살상매체의 비대칭은 그 매체의 소유자가 상대를 전혀 다르게 평가하도록 유혹한다. 그 비대칭은 상대를 범죄자로 격하한다. 우위에 있는 자는 자신의 무기의 우월성을 자신의 '합법적인 대의iusta causa'의 증명으로 간주하고 적을 범죄자로 선언한다. 왜냐하면 '합법적인 적'의 개념을 더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Carl Schmitt, 'Der Nomos der Erde im Vokerrecht des Jus Publicum Europaeum', Berlin, 1950, 298)'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7,11~1985,4,7)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7,11~1985,4,7)

 


공명은 동남풍이 불어올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거니와 주유와 노숙에게 자신의 기원이 확실히 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는 걸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칠성단에서의 '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삼국연의'의 원작자인 나관중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의 의미에 대해선 별다른 주석을 남기지도 않았거니와, '삼국연의'의 원본인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적벽전에 대한 대단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공명의 칠성단 기원의식의 해석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 되겠군요. 저는 칠성단의 기원 예식은 동남풍을 호소하기보다는 조조에 의해 억지로 끌려와 고향땅에서 먼 타지의 적벽강에서 수장당한 중원과 형주의 수많은 병사들을 위한 장송곡이라고 믿습니다.


자애롭고 배려심 깊은 공명의 성격으로 미루어 80만 명의 애절한 정령들을 북두칠성이 반짝이는 피안으로 보내기 위한 위령제였을 겁니다. 아이키도를 처음 접한 어떤 이는 상호간의 예를 통해 서로에게 존경을 표현하고 무리없는 동작으로 서로에게 배려하는 태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반복되는 계고 전에 전방에 예를 취하는 식式은 어디를 향하는가 의아해 합니다. 예식의 예禮가 마음가짐 혹은 내용을 향하고 있다면 식式은 타자와 외부로 흘러나가는 형식을 향하고 있습니다.


계고에 임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한결같을 수 밖에 없다는 이상주의에 빠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발산하는 사토라레悟られ가 아닌 이상 세상 어느 누구도 타인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는 이가 있겠습니까. 마음가짐과 생각은 형식으로서의 식式을 통해서만 전달될 뿐이며, 모든 형식은 이를 받아들이는 이의 해석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식禮式과 탕진蕩盡(2-1) 다시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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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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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산업디자인과 졸업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 건축대학원 졸업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이과대학 과정수료 (물리학)
2003년 3월 - 2007년 11월 극동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
2007년 12월 - 2012년 12월 주식회사 엔폴드 대표 (일본 동경 소재)
현재 도서출판 접힘펼침 대표 (용인시 기흥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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