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기도의 역사와 대동류

우호연무회에서 연무시범을 보이는 이시바시 료이치 6단

합기도 역사와 대동류

<글: 이시바시 료이치 6단>

우에시바 모리헤이 큰선생님이 창시한 합기도는 현재 세계 85개국에 넓혀지고 수행자 수도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단법인 대한합기도회도 국제합기도연맹에 가입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합기도라는 말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대동류라는 명칭도 또한 알려져 왔습니다. 다만 지금은 대동류합기유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합기도와 대동류는 같은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많고 또한 대동류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그리고 합기도의 역사,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다케다 소카쿠의 관계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합기도는 대동류를 원류로 합니다만 합기도의 기술과 이념은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다케다 소카쿠로부터 대동류의 기술을 배우고 나서, 그때까지 수행한 기토류 유술, 신음류 검술, 야규류 유술, 강도관 유도 등을 정리 연구하고 거기에 자신의 철학과 종교관을 도입하여 창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기도와 대동류는 지금은 완전히 다른 무술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합기도라는 명칭만 해도 당초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우에시바숙>이라는 이름으로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숙(塾)은 학원, 교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다이쇼 11년(1922년) 처음으로 <합기무술>이라 이름 붙이고 그 후 쇼와 17년에 정식으로 ‘합기도’라 이름하였습니다.

대동류도 다이쇼 11년 전반까지는 대동류 유술이라고 했던 것이 다이쇼 11년 후반이 되어 대동류합기유술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동류 혹은 합기라는 말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합기도가 크게 발전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합기도의 역사를 말하기 전에, 다케다 소카쿠와 대동류의 흐름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다케다 소가쿠

다케다 소카쿠와 대동류

다케다 소카쿠는 1859년 10월 10일 아이즈 반게마치(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소기치는 무사였는데 체중이 100킬로그램이나 되는 오오제키 스모 선수이면서 검술, 봉술도 뛰어났습니다. 물론 소카쿠도 어릴 때부터 그것들을 아버지를 따라 수행했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오노파 일도류 검술을 정식으로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카쿠는 나중에 오노파 일도류를 대동류 기술에 도입했다고 합니다. 열세 살 때 도쿄에서 검도가 사카키바라 겐키치가 가르치던 직심영류 도장에 내제자로 들어가 2년 반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는 검, 봉, 창, 반궁, 사슬낫, 나기나타 등도 배웠습니다.

1876년 9월 2일 형 소카츠가 죽자 소카쿠는 형 대신 신관을 이어받아 하기 위해 후쿠시마현 히가시시라카와군의 츠츠코와케 신사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의 궁시가 예전의 아이즈번 가로 사이고 다노모, 후일의 호시나 치카마사였습니다.
(※궁시는 신사의 제사를 맡은 신관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소카쿠는 그에게서 아이즈번의 비전유술을 배웠다고 합니다만 확실한 건 알 수 없습니다. 이 신사를 겨우 몇 주 지내다가 뛰쳐나오는데 그 후에도 소카쿠와 치카마사는 때때로 교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소가쿠는 오사카 사카이시의 경신명지류 검술가 모모노이 순조의 도장에 입문합니다. 1877년 9월 소가쿠는 무술수행을 위해 규슈, 오키나와를 여행하면서 공수도가와 시합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1880년에는 구마모토의 사카이 도장에서 창 수련에 몰두했습니다. 이후 1898년까지 소카쿠가 어떻게 활동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만 아마 무사수행을 나가거나 대동류 기술 수련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898년부터 소카쿠는 홋카이도,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대동류를 가르치며 돌아다녔습니다. 이 때 홋카이도 시라타키무라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처음 만나고 홋카이도 엔가루의 히사타 여관에서 30일간 모리헤이에게 대동류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모리헤이는 그 후, 소카쿠의 홋카이도 순회강습에 같이 따라다녔습니다. 1915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1922년 소카쿠는 교토 아야베로 가서 그곳에 있는 우에시바숙에서 5개월간 대동류를 가르쳤습니다.
이 시기에 소카쿠는 ‘합기’라는 말을 대동류의 명칭에 처음으로 도입했습니다.

그 후 다케다 소카쿠와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어떻게 교류했는지는 그다지 확실치 않습니다만 그래도 몇 번인가 교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43년 아오모리에서 소카쿠는 사망합니다. 84세였습니다.
대동류의 성장과 그 흐름에 대해서 현재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데고이>의 기술에서 이어져 왔다는 것, 세이와 천황이 대동류의 시조라는 것, 아이즈번의 비전 유술을 다케다 소카쿠가 외부로 전파했다는 것,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정확한 자료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 대동류는 다케다 소카쿠가 태어난 다케다 집안에 대대로 전해져 온 무술이며 소카쿠가 이 무술에 자신이 오랫동안 배워온 다른 여러 무술을 조합하여 완성시킨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카쿠는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다이쇼, 쇼와에 걸쳐서 살았던 대무술가이며, 엄청난 천재이고, 당시의 많은 무도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합기도

메이지 16년(1883년) 와카야마현 타나베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메이지 35년(1902년) 19세 때 사업을 하면서, 아사쿠사에 살고 있던 기토류 사범 도바리 다키사부로 문하에 들어가 고류 유술을 배웁니다. 또한 동시에 간다 이이다마치의 신음류 도장에서 검술도 배웠습니다.

메이지 36년부터 39년(1903년~1906년) 20세부터 23세 때, 사업을 그만둔 후, 오사카 제4사단 제37연대에 입대합니다. 총검술을 너무 잘해서 사람들이 <군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중사가 됩니다. 나중에 전역하고 사카이에 있는 야규류 나카이 마사카츠 사범의 도장에 다니면서 고류 유술을 배워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메이지 40년부터 42년(1907년~1909년) 24세부터 26세 때, 본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아버지가 자택에 세운 도장에서 다카기 기요이치 씨로부터 강도관 유도를 배웠습니다. 메이지 45년(1912년) 29세 때, 마을 유지 80여 명을 데리고 홋카이도 몬베츠군 다키자와무라로 이주합니다.

다이쇼 4년부터 5년(1915년~1916년) 32세부터 33세 때, 엔가루마치 히사타 여관에서 대동류의 다케다 소카쿠와 만나 그곳에 1개월간 머무르면서 대동류 유술을 배웠습니다. 그 후 시라타키의 사설도장에 소카쿠를 초대하여 지도를 받습니다.

다이쇼 9년(1920년) 3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온가족이 교토부 아야베로 이주. 자택 일부를 개조하여 도장을 열고, <우에시바숙>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다이쇼 13년(1924년) 41세 때, 만주와 몽고의 오지로 나갑니다. 이 때 총으로 습격당하는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총알보다 한 순간 빨리 날아오는 하얀 빛알갱이’를 직감하고 알아채는 경지에 이릅니다.

다이쇼 14년(1925년) 42세 때, 그의 무술은 신기의 경지에 이르러 어느 날 검도 교사인 해군장교와 상대했을 때, 장교의 공격을 죄다 공격받기 전에 알아차려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이치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직후에 온몸이 투명해지면서 천지로부터 오는 황금색 기에 둘러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곧 우주’라는 묘한 진리를 깨닫고, 이때를 기점으로 ‘진정한 무도란 만유애호의 길’이라는 이념과 ‘기의 신묘한 작용’에 대해 터득했습니다. 그후, 아야베는 물론이고 규슈 외 각지에 나가 ‘합기무술’을 가르쳤습니다.

다이쇼 15년, 쇼와 원년(1926년) 43세 이후 상경하여 궁중, 육해군, 재계관계자들에게 ‘합기무술’을 지도했습니다. 이때의 입문조건은 까다로워서 믿을만한 소개자와 보증인이 2명 필요하고 거기에 유도나 검도의 유단자여야만 했다고 합니다.

쇼와 5년(1930년) 47세 이후는 신주쿠구 와카마츠쵸에 새 도장을 짓기 시작하여 이것을 ‘황무관’이라 이름짓습니다. 이 당시의 수련은 매우 격렬하여 우시고메의 ‘지옥도장’이라며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합기무도의 지도와 연무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군대와 경찰 및 곳곳에 지도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쇼와 11년(1936년) 53세 때, 무도계에서 창시자로써 실력과 명성이 높게 평가받으며 그의 기심체(氣心體)와 독창적인 신기는 무도사상 획기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창시자는 종래의 ‘우에시바류 합기무술’을 정식으로 ‘합기무도’라고 호칭하기로 표명하고, 대동류 외에 같은 계열 내지 유사한 모든 유술, 체술에서 본질적으로 비약한 완전히 독자적인 신무도라는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쇼와 17년(1942년) 59세 때, 지금까지 쓰던 ‘합기무도’라는 명칭을 고쳐, 처음으로 정식으로 ‘합기도’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창시자는 합기도를 보급하고 각계 각지에 지도를 계속함과 동시에 2대 우에시바 깃쇼마루 도주가 수완을 발휘하여 합기도의 국제화와 학교, 일반인에 대한 보급, 연무회 운영, 합기도학교 등 차례로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어내 갔습니다.

쇼와 23년(1948) 우에시바 깃쇼마루 2대 도주가 진력 아래 ‘재단법인 합기회’의 인가를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합기도는 대동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하나, 대동류와는 전혀 다른 무도라 할 수 있습니다. 대동류를 완성시킨 것이 천재 무도가 다케다 소카쿠라면 합기도의 기법, 이념을 완성시킨 것은 역시 또 한 사람의 천재 무도가 우에시바 모리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합기도는 대동류가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대동류는 합기도의 융성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누구나 다 아는 무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자는 형제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합기도의 전세계적인 발전에 따라 여러 단체가 함부로 자기네 무술이름에 합기라는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엄히 삼가야 할 일입니다.

우에시바 깃쇼마루 2대 도주 말씀으로는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에서 다케다 소카쿠 선생의 강습회에 17~8세의 한국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아버지 밑에서 <선배님, 선배님>이라 말하며 함께 수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대동류 분은 그 후에도 약간 아버지와 교류가 있었고 한국에 가서 조금씩 대동류를 시작하여 그것이 점점 커져서 한국 사람이 많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합기도가 크게 번성했기에 따라서 합기도라고 이름을 댔는데 그러다가 어느 사이에 여러 유파가 분파해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선생으로부터 편지가 온 일이 있습니다.

<참고문헌>
속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합기도 합기뉴스
전후 합기도군웅전 가쿠 고조 출판예술사
다케다 소카쿠와 대동류 합기유술 합기뉴스
합기도 개조 우에시바모리헤이전 우에시바 깃쇼마루 강담사
우에시바 모리헤이 탄생백년 합기도 개조 우에시바 깃쇼마루 강담사
대동류 합기유술 비전목록 일개조 곤도 가츠유키 합기뉴스
비전 합기유술의 진수 BAB 저팬

번역: 김의수 <E-mail:yuuj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