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2] 사카모토 료마

2. 료마, 큰 별로 떠오르다1)

 

 

에도 시대 말기의 격랑에 휩쓸리듯 방황하던 사카모토 료마는, 가쓰 가이슈라는 훌륭한 스승 덕택에 인격과 경륜 모두 큰 발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료마는 새 시대의 해군을 양성한다는 큰 일을 맡았지만, 안타깝게도 정국의 변화로 인해 그의 해군조련소 경력은 1년 남짓한 기간을 채우고 끝이 나고 맙니다. 하지만 시대의 거대한 물결은 그에게 해군조련소 교관보다도 더욱 막중한 대업을 안겨 줍니다.

 

 

삿초동맹(薩長同盟)의 중재자화합과 평화를 사랑했던 정치인 료마

독자 여러분은 ‘업보’라는 개념을 믿으시나요?
학문을 업으로 삽는 제 입장에서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이런 개념의 실존 여부를 지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살펴보면, 업보가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도 합니다.

료마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삿초동맹의 배경 이야기를 보면, 바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에도 막부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설립됩니다.

인내심의 화신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일본 전국시대를 사실상 통일했던, 그리고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악명높기도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린 아들 하나만 남긴채 세상을 뜨자 일본 통일의 야심을 드러냅니다.

이런 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히데요시의 충복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그리고 일본 혼슈 서부 일대를 지배했던 거대 다이묘 모리(毛利) 가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가고시마 현 일대인 사쓰마(薩摩) 지방을 다스렸던 시마즈(島津) 가문의 주전파였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도 군대를 이끌고 이들에게 가세하였습니다.

화산 지형으로 토질이 척박했던 사쓰마는 해상무역, 밀수 등에 많은 노력을 쏟다 보니 사쓰마 사무라이들은 일본에서도 거칠고 싸움 잘 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이들은 우리나라와도 악연이 있는게, 당시 일본에서도 손꼽히던 맹장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물로 꽤나 악명을 떨쳤습니다.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을 전사케 한 왜군들도 바로 사쓰마 군대였지요. 모리 가문은 반 도쿠가와 세력의 맹주 역할을 하다 도쿠가와군에게 패배한 다음 영지가 3분의 1로 축소되어 버렸고, 오늘날 야마구치(山口) 현 일대인 조슈(長州) 번 다이묘 가문이 됩니다.

사쓰마 번은 번 전체가 아닌 일부 세력만 반 도쿠가와군에 가담한데다 워낙 변두리여서 에도 막부로부터의 직접적인 처벌은 피해 갔지만, 어쨌든 ‘요주의 세력’으로 막부의 눈 밖에 단단히 나게 됩니다.
이처럼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이 두 지방이 훗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어 에도 막부를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면, 세상에는 인과응보라는게 존재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이 당시 사쓰마, 조슈 두 번은 일본에서도 굉장히 큰 번, 이른바 웅번(雄藩)으로 불렸던 대 세력이었습니다. 게다가 두 번 공히 미국, 프랑스 등 서양 세력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 바 있는, 대표적인 반외세 세력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두 번이 힘을 합쳐서 서양 세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허울만 남아 있던 일본 왕실을 복위시켜 일본을 단합시킨다면 일본이 외세를 물리치고 강대한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으리라는 여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번이 실제로 동맹을 맺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은 상태였습니다.

비교적 온건 노선을 견지했던 사쓰마와 달리 조슈는 급진적인 반외세, 반막부 세력이었고, 1863-64년에는 이들 간의 정치적 대립이 물리적 충돌로 비화된 탓에 두 번은 적대 관계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해군조련소를 나온 다음 사쓰마의 식객으로 지내던 사카모토 료마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두 번 사이의 화합을 중재해 내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가쓰 가이슈를 도와 해군조련소를 운영하고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 훌륭한 스승 밑에서 눈 앞의 사소한 의리를 넘어 나라의 미래를 큰 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거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나카오카 신타로(출처: 위키피디아)
나카오카 신타로(출처: 위키피디아)

그는 동향 출신으로 조슈 번에서 활동하던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 1838-1867)와 더불어,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던 이 두 번을 화해시켜 동맹을 맺도록 하는일에 착수합니다.

그들은 일본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은 시점에서 두 번이 사사로운 적개심을 내려놓고 일본의 미래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논리로 그들을 설득합니다.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나카오카 신타로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습니다.

1866년 5월 7일, 일본사를 바꾸어 놓을 두 번 간의 동맹이 마침내 체결됩니다.
이 동맹은 사쓰마, 조슈 두 지명의 앞 글자를 따서 ‘삿초(薩長)’동맹으로 불립니다.
한편 두 사람은 고향인 도사 번에도 서신을 보내어 삿초동맹의 대의를 설파하고, 에도 막부에 복종하는 대신 새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도록 설득합니다.

도사 번은 그들의 설득에 응했고, 탈번한 죄인이었던 두 사람은 번으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 덕분에 도사 번 역시 메이지 유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쓰마와 조슈의 위치(출처: 중앙일보 박보균 기자 블로그)
사쓰마와 조슈의 위치(출처: 중앙일보 박보균 기자 블로그)
나라사키 료(출처: 위키피디아)
나라사키 료(출처: 위키피디아)

 

사카모토 료마, 일본 최초로 신혼여행을 다녀오다

삿초동맹을 체결한 두 사람은 존왕양이 세력의 영웅으로 부상하지만, 막부 측에서는 불순분자로 몰려 제거 대상에 올라갑니다.
삿초동맹이 체결된 다음날, 교토 인근의 데라다야(寺田屋)라는 여관에 묵고 있던 료마와 신타로 두 사람은 열 명도 넘는 수많은 괴한들에게 습격받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부터 무예를 갈고닦았던 사무라이였지만 중무장한 수많은 자객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데라다야 여관의 여종업원 나라사키 료(楢崎龍)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여관을 빠져나가 목숨을 건집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사카모토 료마와 나라사키 료는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데라다야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료마는 아내 료와 함께 사쓰마의 기리시마(霧島)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는데, 이 두 사람의 온천 여행은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시 소재 가메야마 조합터에서(2014년 8월 촬영)
나가사키시 소재 가메야마 조합터에서(2014년 8월 촬영)

 

기업인 사카모토 료마, 가이엔타이

삿조동맹은 사카모토 료마의 정치적 역량과 이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큰 업적입니다.

동맹을 맺은 두 번의 앞에는, 서양 세력의 간섭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왔던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열어야 할 과업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같은 과업을 어떻게 해야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요?
유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치가들의 결단도 필요했지만, 무기와 자금을 공급하고 요인들을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단도 필요했습니다.

더욱이 규슈 남부의 사쓰마와 혼슈 서부의 조슈 두 번은 바다 너머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두 번을 이을 뱃길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이제 료마는 정치인에서 경영인으로 변신합니다.

해군조련소가 해산된 뒤 사쓰마 번의 원조로 나가사키에서 가메야마 조합(亀山社中)이라는 작은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료마는, 이를 가이엔타이(海援隊)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여 삿초동맹의 지원에 나섭니다.

한편 가이엔타이의 선박이 기슈(紀州) 번2) 선박과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그는 당시의 국제법이었던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따라 사건을 잘 마무리지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국제법이 도입되는 선구로 평가받는 동시에, 사카모토 료마의 국제감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1)본 연재는 필자가 번역(공역)한 다음 책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손일·이동민 역, 2014,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푸른길(원서: Jansen, M. B. 1971. Sakamoto Ryōma and the Meiji Restoration.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오늘날 미에(三重) 현과 와카야마(和歌山) 현 일대에 걸쳐 있던 번-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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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 동 민

저자 소개

대구교육대학교 졸업(200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교육학박사, 2014)

전) 대구교육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현)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초빙교수

한국교원대, 서울교대, 서울대, 공주대, 전남대 등 출강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한국번역가협회 정회원

주요 저역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역서, 2013, 논형)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공역, 2014, 푸른길)

『지리의 모든 것』 (역서, 2015, 푸른길)

주요 연구업적:

How to design and present texts to cultivate balanced regional images in geography (Journal of Geography, 2013)

Mindful learning in geography: Cultivating balanced attitudes toward regions (Journal of Geography, 2015)

이동민
대구교육대학교 졸업(200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교육학박사, 2014) 전) 대구교육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현)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초빙교수 한국교원대, 서울교대, 서울대, 공주대, 전남대 등 출강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한국번역가협회 정회원 주요 저역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역서, 2013, 논형)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공역, 2014, 푸른길) 『지리의 모든 것』 (역서, 2015, 푸른길) 주요 연구업적: How to design and present texts to cultivate balanced regional images in geography (Journal of Geography, 2013) Mindful learning in geography: Cultivating balanced attitudes toward regions (Journal of Geography, 2015) E-mai: dr.dongmin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