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도는 옛것을 따른다.

무도는 더 낳은 사람을 보고 따르는 것이다.


고등학교때 검도(劍道)를 배우기 위해 방배동에서 천호동까지, 지하철이 없을 때라 버스를 타고 배우러 다닌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검도장이 드물었다. 정통 합기도장이 드문 지금과 똑같다. 94년경 TV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배우 이정재의 검도 연기가 강한 인상을 남긴데에 힘입어, 검도 인구가 눈에 띄게 성장하였다.

부수적으로 전통무술을 표방하는 신생 검도 조직이 여럿 생기더니 단기 교육으로 사범자격증을 남발하는 부작용도 생겼다. 수많은 유사검도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어느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갔다. 이러한 조직을 만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단증발행이다. 사범자격증도 만들고 경기를 하는 곳에서는 심판자격증도 만들어서 발행한다. 너무나 당연스러워서 토를 달지 못할 지경이다.

마치 물들어오자 노젓는다는 식으로 단증과 지도자 자격증을 남발하고 있다. 유럽이나 호주 등 해외에서 가르치는 무도장(武道場)을 살펴보면 평균 2단이나 3단이 가르치는 도장이 많다. 가르치는 지도자가 4단만 되어도 실력있는 도장으로 인정받곤 한다. 한국에서는 지도자들의 기본 단위(段位)가 4단이상으로 매우 높다.

그것은 실력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조직의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기과정 혹은 교차인증 명목으로 단증과 자격증을 남발하고 있다.
  무도는 보수적이다. 이른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그대로 실천하는 곳이 도장(道場)이다. 조금 답답하게 느낄만큼 사제지간의 관계가 철저하고, 유지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유무형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노력의 축적을 고려하여 조직의 단위(段位) 관리 원칙에 따라 승단급의 과정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곳이다. 이런 불편함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협회가 평가하고 증서를 만들수는 있지만 협회가 나서서 몇번 혹은 몇시간 가르친 것을 가지고 사범자격증을 주는 것은 오랫동안 지도해온 선생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과거 수련했던 협회명도, 지도자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뜬금없이 단증 재발급 문의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여타 자격증명처럼 소정의 수수료만 지급하면 발급받을 수 있는줄 아는 무지와 무례의 현주소다. 무도 단증은 최소한의 요식행위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보다 못한 민간자격증으로 취업문 앞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청년들의 등골을 뽑는 현실에 아무도 분노하지 않더라도, 도장에서는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피땀이 베인 그 무형의 가치에 대한 존중은 없고, 돈에 의해서 유형의 단증으로 교환할 수 있는 그것이 비록 취업에 조금 도움이 될지언정 어떤 가치가 있을까?
 무도가 가르치는 복종은 주종의 관계나 군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더 나은 사람을 보고 따르는 것이다. 도장에는 스승을 따르고 배우려는 제자, 그리고 자신보다 나은 선배와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후배가 존재한다.

스승이 도복을 입고 매트에 섰을 때, 제자라면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집중해야 한다. 기술과 철학을 그대로 물려받을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항상해야 한다. 무도에서 복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이러한 과정도 없이 지도자가 되어 있다면 그것은 무도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된 조직과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 조직의 수장이 제자를 지도하지 않고 경영과 정치에만 몰두해 있다면 인연을 끊어야 한다.

일본을 왕래하며 놀랐던 일은, 극진회관의 최영의 총재나 합기도 세계본부(合気会)의 도주는 정해진 시간에 직접 수련지도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그 정도 위치나 연세에 그런 모습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던지라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도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단을 받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있다. 성실하게 수련에 임하지 않는 제자를 승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의 실력과 함께 유무형의 노력을 두루 살피고 나서야 응시여부를 결정한다. 그리고 합기도 세계본부의 원칙에 따라 철저하게 평가하고 반영한다.

이런것이 가능한 것은 내 자신이 최영의 총재나 합기도 도주가 그러하듯이 두 다리로 설 힘만 있다면 도복을 입고 제자들을 지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키워낸 지도원들 역시 마찬가지고 이는 대한합기도회가 끝까지 고수하고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