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승리를 상품으로 하고 있는 것

국기원에서 태권도 승단심사를 보고 있는 필자.

지난주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의 고니시 마도카(小西真円) 6세 종가와 차를 나누며 “당신에게 무도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한 마음에 기대를 걸고 답을 기다렸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특별히 고민해 본 적이 없다며 짤막하게 “일상이라고 해야 할까?”라고 했다. 그는 자신에게 무도는 특별한 무엇이 아닌 그냥 일상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어제 오사카에서 온 사토 유지 선생(6단)은 신촌도장에서 수련을 마치고 무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무도는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파트너를 던지면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냐고 짓궃게 되물었다. 합기도를 하고 있는 선생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도는 인생이다” “삶이다” “사랑이다” 라고 말한다.

모든 스포츠와 무술은 승리를 상품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최고의 승리를 선사하기 위해서는 시합이 있어야 한다. 어렸을 때 나는 금단 증세를 느끼듯 시합을 기다리곤 했다. 선수를 기르고 있을 때는 기약없는 대회를 기다리지 못해 직접 격투기 조직을 만들고 시합을 개최했다. 그 당시에 전국에서 가장 많은 격투기 챔피언을 만들어 냈다.

“증명할 수 없으면 신뢰할 수 없다” 승리를 상품으로 하는 모든 것은 대회를 필요로 한다. 승리한 선수는 기쁘고 영광스럽다. 패배한 선수도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시합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렇듯 우리는 패배가 잘못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누구든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토대를 이룬 승리에 집착하는 환경에 살고 있다. 패배는 악이고 승리는 선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승리에는 문제가 없다. 축구시합에서 이기고 태권도나 유도 대회에서 승리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승리한 자는 항상 자신을 좋게 이야기하고 사람들은 경기가 처절할수록 환호하며 승리자에게 몰려든다. 대리만족을 통해 승리를 기뻐한다. 패배란 단어에도 악의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실패자라는 낙인과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우울한 감정의 집합은 감추기 어렵다.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시합은 게임일 뿐이고 승리는 오직 시합에서 제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 인생은 시합에서 결정되는 승패가 기준이 되지 않는다. 강한자는 강한 삶을 살아가고 약한자는 매사가 조심스러우면 된다. 싸움에 집착하는 자들을 보면 승리 이면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약한 자가 승리라는 상품에 집착하는 것은 강한 자의 허세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폭력적이지 않다. 패배에 대한 불필요한 불안은 없어야 한다. 승리의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시합에 나가는 선수가 패배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 상품은 불량일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두렵다면 자신을 패배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승리에 대한 집착을 보일수록 인간은 더욱 폭력적이게 되고 그만큼 불행해 지는 것이다.

사랑, 너그러움, 관대함, 성숙함, 상호존중, 바른 몸가짐, 자발성, 조화로움, 소통, 검소함, 또한 얼마나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을지를 탐구하는 것, 이런 것은 시합이나 대회에서 승패로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합기도(Aikido)는 바로 이런 것을 교육 시킨다.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그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해내는 것이다.

해낸다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성이 생기듯, 별거 아닌 것처럼 이겨낼 수 있다. 그것이 강한 표현을 하는 무술일 경우 그것 또한 이겨내야 하는 미션일 뿐이다. 시합에 나가는 선수는 그 시합이 미션이다. 강한 자라면 매 시합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시합이 두려운 것은 패배를 불행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짜 불행이다.

지나친 욕심이 과부하에 걸린 것과 같다. 지금까지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승리에 대한 상품을 팔아 왔다.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패배자는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패배란 단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 중 가장 우울한 언어이고 그래서 시합장에 적합한 선수처럼 생각하는 삶을 우리는 살아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게임일 뿐이다.

정의가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지는 경기로 보는 모든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그들은 사기를 치고 있다. 이기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갈등에 승자와 패자가 있다는 걸 믿게 만들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우리는 주변에 실패한 자의 삶을 이야기하거나 비교하며 기분을 좋게 환기시키곤 한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즐겁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일종의 게임처럼 삶에 대한 잘못된 지각으로 주입되어 있다. 교육이 인간의 순수성을 찾고 타인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하고, 무술이 다툼이 아닌 조화로움을 인식시키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즐거움이라면 많은 재산을 가진 것보다 더한 축복이 될 수 있다. 자연은 갈등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은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갈등을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를 따먹은 부정적인 형벌로 치부하지 않고 자연의 작용으로 본다면, 우리의 생명 활동이나 심리작용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조화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더 좋은 방식으로 해결하게 된다. 그것을 선악으로 구분하고 싸워야할 대상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갈등을 오해하거나 심하면 그것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패배에 대한 느낌을 단어로 표현하면 슬픔, 왜소함, 우울, 두통, 아픔, 현실 도피, 끔찍함, 성질, 바닥 등등이다. 반대로 승리에 대한 단어는 황홀과 같은 패배와 반대 단어들이다. 만약 승자에 대한 명부와 패배자에 대한 명부가 있다고 한다면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패배자의 명부에 자신이 있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패배자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승자의 감정으로 살고 싶다면 패자의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내야 한다. 우린 인생을 승자의 감정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승자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누군가를 파괴하여 승리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패배자를 만든다는 점에서 완전한 승리가 아니다. 당신의 승리가 다른이에게는 패배가 된다는 점에서 타인의 실패를 기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게임이 아닌 실제 인생이라고 한다면 승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반대가 될 수 있다. 긍정적인 단어로서 사랑은 패배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두 사람이 사랑을 가지고 시합을 한다면 둘 모두 승리자가 될 것이다. 작고 큰 차이는 있지만 어느쪽에서도 패배를 찾을 수 없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승패를 초월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합기도는 사랑, 너그러움, 관대함, 성숙함, 상호존중, 바른 몸가짐, 자발성, 조화로움, 소통, 검소함, 등과 같은 긍정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운동이다. 훈련에서도 패배자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갈등이나 다툼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결정할 수 있도록 승패가 난무하는 경기장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승패에 대한 걱정이 없다면 당신은 좀 더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물론 요점은 당신이 시합을 선택했는지, 안 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필자의 에세이집 ‘무도에 눈뜨다.(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