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처음 아이키도를 만나게 되다.

기계체조 선수셨던 아버지
태권도 전국대회 단체전을 준비하고 있는 아버지 제자들 모습
아버지 도장을 신축하고 1회 심사를 기념하는 모습, 1966년도
아랫줄 가운데 제일 어린 필자의 모습(1969년)

신촌도장에서 수련이 끝나고 아이키도가 한국에 처음 정착하면서 무엇이 문제였고 힘들었는지 이야기를 듣던 회원이 글로 적어주면 재미있겠다고 해서 추억담을 써볼까 한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나는 태권도 관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젖 땔 무렵부터 태권도와 함께 해왔다. 도장에서 태어나서 도장에서 자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 대전에 있는 친척집에 갔다가 합기도장을 보게 되었고 손목을 꺽고 던지는 모습이 신기했던 아버지는 그자리에서 입문했다. 그리곤 아버지 도장에 합기도 간판을 추가하고 마루바닥 절반을 다다미로 깔았다. 사범을 데려와서 합기도를 시작하셨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태권도장에 합기도를 개설했다. 가운데 어린아이가 필자
아버지는 박계홍씨를 사범으로 벌교와 보성에 최초의 합기도장을 개설하였다.(1970년)

그 당시는 몰랐지만 부드럽다는 뜻을 가진 야와라와 신기에 가까운 합기가 위주인 유술이었던 합기도 기술을 잘 몰랐던 시기에 발차기가 도입되면서 주객이 바뀌듯 발차기가 위주가 되면서 태권도에 호신술을 섞어 놓은 형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 또한 새로운 깨달음이었다면 새로운 무명(武名)을 써야 했다.

처음 아버지 도장 역시, 당수도, 태수도, 수박도라는 명칭을 사용하던 과도기에 개관을 하였다. 그때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말로 진짜를 참당수, 가짜를 개당수라 했다. 1955년4월11일 최홍희 소장을 중심으로한 명칭제정위원회에서 태권도라는 단일 이름으로 통일시키고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하면서 통합되었다. 후진들을 위한 새로운 시대에 맞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78년 전후로 기억이 된다, 강남에 위치한 반도유스호스텔에서 합기도 사범교육이 있었다. 그 당시 대한기도회와 대한합기도협회가 통합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지한재 선생이 교육장소에 참석했다. 그리곤 “최용술씨를 아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는데 교육에 참석한 우리는 “잘 모릅니다!”라고 했다.

나는 많은 합기도 사범들을 만나 보았지만 최용술의 일화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교육장에 온 지한재 선생은 최용술씨에 대해 얘기를 하였고, 지금 생각컨대 최용술 선생의 핵심 제자였던 분 가운에 한 명으로서 입에 담기에는 좀 불경한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최용술 이라는 분의 존재를 알게되었다.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서 선생의 수제자가 한풀 창시자 김정윤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분이 가장 오랫동안 최용술 선생을 측근에서 모셨던 분이라는 것도 알았다. 김정윤 선생은 최용술 도주가 실제 합기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했다. 한풀의 탄생도 결국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국술을 비롯한 기타 분파된 다른 무술도 마찬가지 고민이었을 것이다.

국기원 태권도시합에서 발차기를 하는 필자(77년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격투기 참피온전에서 우승한 필자(1985년도 )
태국에서 무에타이 참피온들과 함께 기념 컷!

나는 학창시절 태권도 선수로 신인왕전에 출전하면서 합기도 대회에도 출전했다. 합기도 시합은 태권도 경기에 비해 쉬웠다. 그런 경력이 결국 격투기로 이어졌고 극진공수도 시합에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격투기 선수였던 나는, 극진공수도 보다 더 치열한  무에타이에 더 관심을 갖었고 태국을, 좀 과장하면 안방 드나들듯 해가며 무에타이를 한국 최초로 도입하게 되었다.

지금은 나의 인생이 되어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렸을때 운동은 아버지가 무서워서 했고 차츰 주변에서 잘한다는 칭찬에 으쓱하는 마음 때문에 열심히 했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는 당시 유명 의류회사인 논노의 후원을 받으며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로 스스로 착각하며 살아왔다. 내가 우물안 개구리의 착각에서 벗어난 계기는 태국에서 무에타이 선수들을 만나면서였다.

처음 한국에 트레이너로 초청한 태국참피온 반팻과 함께한 필자와 논노회장

이후 태국 선수를 초청해서 전국적으로 무에타이를 지도보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가 내가 투기운동에 전념했을 때의 이야기다.

아이키도를 만나는 과정은 정말 의외였다.  매년 일본 가라데 시합에 출전하는 나를 아버지는 해외 여행이나 다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극진공수도 한국회장으로부터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나는 그것을 다시 돌려 받는 대신에 일본 경기때 아버지를 임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좋다고 했고 6월 오사카 대회에 아버지를 모시기로 약속했다.

일본에서 극진공수도 시합중인 필자

그런데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버지는 바보같이 사기를 당했다며 고소하라고 했고 나는 그분에게 전화해서 왜 약속을 안지키냐고 했다. 당황한 그는 올해는 일본에 경기가 다 끝났으니 다음 해에 모시고 가면 안되겠냐고 했지만 당장 고소할 것 같은 아버지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는 일본 대신 타이페이라도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했다.

꿩대신 닭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타이페이로 결정이 되었다. 그리고 극진공수도 한국회장과 아버지 두 분이 타이페이에 가게 되었고 관광을 시작하기 전에 호텔 주변을 둘러보다가  ‘合氣道’ 간판을 보게 되었다. 그곳이 ‘타이페이 용산구체육회 합기도위원회’였다. 호기심으로 들어갔고 때마침 한국에 관심이 많던 대만 관계자는 12월에 다시 만나 친선교류를 하자고 제안했다.

급하게 12월 타이페이에서의 친선교류 준비를 해야 했다. 이때만 해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할 때라서 단체로 해외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단체교류를 하려면 정부기관이나 협회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대한기도회 소속이었던 아버지는 기도회 사무실을 찾아가 교류할 수 있도록 승인을 부탁했으나 지부도장의 해외교류를 허가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타이완과의 교류를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20년 이상 인연을 맺어왔던 기도회를 떠나 국제연맹한국합기회를 찾아갔고 기도회 단증을 모두 바꾸는 조건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1988년12월 아버지를 단장으로 해서 타이페이로 출발할 수 있었다.

타이페이 합기도와 친선 시범교류 첫날, 나는 그동안 내가 해왔던 합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부에서 계속>

타이페이에서 첫 교류를 하였을때 타이페이 측으로 부터 받은 선물(1988년12월)         

 

*<2부>합기도 새로운 조직을 만들다. 들어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