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스가와라 테츠타카 선생 인터뷰(2011) by Geoff Sinha

스가와라 테츠타카

(원문 주소 : https://www.facebook.com/296007080452431/photos/a.298344066885399/427708377282300)

스가와라 선생은 내게 감사하게도 가르침을 주신 분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분 중 하나이다. 그의 이야기는 대단하다. 홋카이도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아이키도, 카토리 신토류, 도검 제작, 오키나와 가라데 및 중국 무술을 망라한다.

스가와라 선생은 세계 20여개 국가를 활발히 오가고 있다. 또한 저술 활동 역시 왕성하다. 스가와라 선생과 대화하면, 그가 얼마나 지적이고 영어를 잘 하고, 유머러스한지 알 수 있다. 매트 위에서 그의 강함과 스피드 그리고 집중력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의 지도 방식은 이해하긴 쉽지만 깊이가 있다. 여러분이 스가와라 선생을 언젠가 꼭 만나보길 바란다.

아이키도를 언제부터, 그리고 왜 시작하셨습니까?

아이키도를 처음 알게 된 게 20세때였어요. 제가 나고 자란 홋카이도에서 누나가 살던 도쿄 시부야로 옮기기 1년 전이었죠. 누나와 저는 가난해서 1년 반 정도 불교와 신토가 반반 섞인 곳에서 스님 생활을 했어요. 명칭이 ‘천도天道’였는데, 왜인지는 몰라요.(웃음) 저는 하얀 가운과 하카마를 입고 매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았어요. 매일 250곳 정도 돌았는데, 1천 엔 정도밖에 못 벌었어요.(웃음). 이 돈을 종단에다 바쳤죠.

사실, 스님이 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좋은 경험이었어요. 몇몇 사람, 특히 창가학회 사람들은 저를 아주 싫어했지만, 저는 개의치 않았어요. 제게 주는 게 좋든 나쁘든 그저 받아들였어요.

그러다가 아이키도를 알게 되었어요. 아이키도 본부 도장이 제가 수행하던 곳에서 아주 가까웠고,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 큰선생이 내제자를 보내서 저와 다른 행자들에게 아이키도를 보여주었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키도를 하는 사람이 우리 절에서는 저밖에 남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만두었지만, 저는 계속했어요.

그러자 얼마 지나서 우리 종단의 지도자가 저를 부르더니 3가지를 얘기했어요. 우선, 스님이 되는 건 그만두고 아이키도를 시작하라고. 그가 말하길 큰선생은 700년에 한 번 나오는 훌륭한 선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큰선생 밑에서 배우는 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당시 제가 19세인가 20세였는데, 저는 그분의 말을 전혀 의심히지 않고 ‘예, 그리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죠.

선생이 제게 준 두 번째 조언은 중국의 음양론을 배울 것, 마지막은 영어를 배울 것. 제가 장차 세계를 돌아다닐 테니 영어가 필요할 거라면서요. 이렇게 3가지를 조언하셨는데, 저야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으니, 실천하는 건 쉬웠어요.

당시 내제자는 누구였습니까?

본부 도장에는 치바 카즈오 선생, 타무라 노부요시 선생, 카나이 미츠나리 선생이 내제자로 있으면서 제가 있던 절에서 아이키도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어요. 저는 1년 뒤에 이와마에 가서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내제자가 되었죠.

이와마 도장에 누가 견학하러 방문하면 세게 했지만, 이 사람들이 가고 나면 세게 하기만 한 건 아니고 살살하기도 했어요. 이와마 시절이 참 즐거웠죠.(웃음)

제가 이와마에 있던 시절에 선배로 히로사와 히데오 씨가 있어요. 히로사와 선배는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전업 농부였는데, 제게 농사를 가르쳐줬어요. 매일 함께 농사를 지었죠. 선배는 제게 모를 심고 벼를 기르고 수확하는 걸 가르쳐줬어요.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이와마에 살면서 도쿄에 있는 쇼가쿠칸 출판사 도장에서 아이키도를 지도하고 있어요.

이와마 도장에서는 카에시와자(반격기)를 배우기도 했어요. 많진 않지만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그래서 45년이 지나 카에시와자 42식을 1-4개 카타로 나누어서 만들었어요.

큰선생의 기술을 받아보셨습니까?

큰선생의 기술을 받았죠. 당시 70세 정도였고, 아주 부드럽게 하셨어요. 만일 누가 상대에게 너무 딱딱하게 하면 야단치시며 부드럽게 하라고 하셨죠. 또 저처럼 예민하게 움직여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큰선생은 언제나 한 박자 공격을 가르치셨어요. 전신을 집중해서 한 박자로 움직이며 공격하도록 했죠. 그리고, 서로 눈을 바라보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눈을 보지마! 집중해!’라고 하시고는 했어요.

도장에서 큰선생은 뭐가 딱딱하고 뭐가 부드러운지 설명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날 잘 봐, 잘 보라구!’라고만 하셨어요.

수 년간 수련하면서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하고서야 깨달았어요. 선생이 식사를 하실 때 들고 계신 젓가락, 음식에까지도 집중했어요.

큰선생은 서는 법도 보여주셨어요. 누가 머리를 밀어도 큰선생은 절대 뒤로 넘어지지 않았어요. 큰선생이 앉아 있어도 밀리지 않았어요. 두 명이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죠. 그게 선생의 지도방식이었어요.

당시에는 제가 어려서 집중이란 게 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중에서야 카토리 신토류를 배우면서 그게 조금씩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모두 이해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죠.(웃음)

큰선생의 가르침이나 발상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수련자가 많은 이유는 큰선생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서예요. 우리는 그저 큰선생이 가르치는 게 뭔지 짐작만 하지만, 수련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게 돼요.

카토리 신토류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카토리(신토류)와 아이키도는 아주 비슷해요. 아마도 두 유파의 창시자가 같은 생각을 한 게 아니었을까. 카토리의 창시자인 이이자사 초이사이 이에나오(1387~1488)과 아이키도의 창시자의 사이에는 600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두 분의 발상은 거의 같아요. 제가 절에 있던 시절의 선생은 위대한 선생은 700년마다 나온다고 했는데, 카토리와 아이키도의 창시자는 아주 비슷해요.

제가 고안한 ‘쿠미조(組杖=켄조아이)’는 이와마의 아이키조(合気杖)와 카토리 신토류 검술을 섞은 거예요. 쿠미조 1~8번(과 응용)은 ’31의 장’을, 그리고 ‘조아이(杖合)는 ’13의 장’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카토리 신토류를 가미한 거죠.

저는 항상 무술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고, 연구를 계속했어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유도, 그 다음에 아이키도. 그러면서 사이토 모리히로 선생의 ‘Traditional Aikido'(전 5권)을 출판했어요.

이 책을 출판하고나자 다음에는 뭘 낼지 소재를 찾기 시작했어요. 국립도서관에 가서 일본 무술의 기원에 대해 찾아봤죠. 검술, 창술 등 많은 유파가 있었어요. 그런데 카토리 신토류만 이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카토리 신토류에 대한 책을 내기로 결심했죠.

치바현 나리타에 있는 오타케 리스케 선생의 도장인 신부칸에 찾아갔더니, 선생도 책을 내는 걸 허락했어요.[당시까지 카토리 신토류는 문외불출이었다.] 제 1권이 나왔을 때, 선생의 초등학교 은사께 선물로 드렸더니 막 우시더래요. 오타케 선생도 제게 아주 고마워하면서 기뻐했고요.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2권, 3권까지 속속 카토리 신토류에 대한 책을 냈어요.

그런 다음 카토리에 입문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어요.[스가와라 선생은 1986년 교사 면허를 받는다.] 카토리 신토류는 아주 강한 스타일이에요. 창시자는 치바 가문 밑에서 50명의 병사를 이끌고 큐슈에서 쿠빌라이 칸의 몽골군과 싸우기도 했죠. 이후 옛 카토리 신사에서 명상과 수행을 했어요. 그렇게 깨달음을 얻어 카토리 신토류를 창안한 거예요.

그리고 돈 드래거(Donn Draeger)라는 미국 군인이 있는데, 2차 대전 종전 후에 맥아더와 함께 일본에 왔어요. 돈 드래거는 나중에 연금까지 포기하면서 퇴역한 다음 일본 무술을 연구했어요. 아주 가난했지만, 카토리 뿐만 아니라 무소신덴류 장도(夢想神伝流杖道) 등도 수련했죠. 그와 오타케 리스케 선생의 도장에서 함께 수련했어요. 돈 드래거는 많은 책을 썼고, 일본에서 유명해졌어요. 유도도 배워서 고단자가 되었는데, 하도 많이 다리 기술에 당해서 무릎이 몇번이나 망가졌어요. 돈 드래거는 책을 통해 카토리를 서양에 알렸죠. 그가 제 카토리 신토류 책을 ‘The Deity and the Sword – Katori Shinto Ryu’라는 제목을 달아 영어로 번역해주었어요.

돈 드래거(좌)와 오타케 리스케(우)

그 다음 책이 ‘전통 가라데도(空手道) – 오키나와 고주류(剛柔流)’였어요. 시합용이 아니라 전통 방식을 배웠어요. 이 책을 작업하면서 서로 다른 유파의 깊은 속살을 익히고 연구할 수 있어서 아주 행복했어요.

이게 제가 아이키도만 수련하지 않는 이유예요. 저는 카토리 신토류, 오키나와 고주류, 그리고 태극권과 중국 무술도 배웠어요. 1989년에는 4명을 동행해서 중국에 가서 중국 무술과 오키나와 고주류 가라데와의 연관성을 연구하려 했어요. 푸저우 시에서 중국 무술의 여러 삼전三戦 투로와 오키나와 고주류의 삼전サンチン 카타를 비교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연구자가 오키나와 가라데의 뿌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어요. 그 이후로 저는 연구를 그만뒀어요.

당시 저는 좋은 팔괘장 선생을 푸저우 시 무술협회에서 알게 되었어요. 이분은 지금 제 도장에서 태극권을 가르치고 있어요. 일본어 어학당에 학생으로 왔다가 나중에 도쿄 가쿠에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일본으로 이주했죠. 학생 시절에는 제 도장에서 묵었어요. 이분께 진식 태극권과 다른 중국 무술을 익혔어요. 이 모든 유파들이 좋은 인간 관계, 발상을 가져다 주었고, 제 카토리 신토류와 아이키도 수련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전 세계에 걸친 커뮤니케이션은 아주 중요해요.

현대 아이키도는 선생님이 본부에서 있을 당시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오늘날 아이키도는 아주 널리 퍼졌죠. 큰선생은 내제자들에게 해외로 나가라고 했어요. 치바 선생은 영국에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갔고, 타무라 선생은 프랑스, 카나이 선생은 미국, 도헤이 (아키라) 선생은 시카고로 갔죠.

이 선생들은 항상 연구하고 배우면서 자기 수준을 올릴 필요가 있었지만, 이건 사실 내가 집중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더 높은 선생을 갖지 않는 한 쉬운 일이 아니에요.

30년 전에 캘리포니아, 시카고, 워싱턴 등에서 아이키도와 카토리 신토류를 지도하기 시작했어요. 그 덕분에 카토리와 아이키도를 지도하던 제 제자들 역시 실력이 아주 향상되었죠. 시카고와 미주리주 캔사스는 카나이 선생과 토헤이 선생이 돌아가신 뒤부터 방문하기 시작했어요. 작년에 토헤이 선생의 부인께서 세미나에 오셔서 제게 티셔츠를 주시기도 했죠.

아이키도는 실전에서 얼마나 유용한가요?

실전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수련은 보통 1시간 반이죠. 유술은 길거리 싸움용이고, 제 부드러운 스타일도 길거리 싸움에서 유용해요. 예전에는 싸움을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아요.(웃음) 정신력이 가장 중요해요. 두려움을 가지면 어떤 기술도 쓸모가 없어요.

제가 쿠미조(켄조아이)와 그 변화기를 만든 것도 한 가지 방식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에요. 공격에서나 수련에서나 상대가 방식을 바꾸면 나도 즉시 바꾸어서 카운터를 날려야 해요. 실전과 유사하죠. 더 쉽게 가르칠 방법을 궁리하고 있어요. 아주 중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