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수련생 아이키도 회복기 (부제: 암을 이긴 아이키도)

  
이 이야기는 저의 아내 이정희씨의 이야기입니다.
큰 사고와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큰 질병.

그리고 건강을 회복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1.

우리 부부는 신혼 초에 교통사고를 크게 겪었습니다.

정희씨는 그 사고로 영구장애라는 장애판정을 얻었습니다.

사고 후 의식이 없다가 정말 긴 시간만(세달 반동안 의식이 없었음)에 기적적으로 눈을 떴으며, 그 이후에도 거의 거동을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병원에 있어야 했습니다.

누워서 진통제를 비롯한 수많은 주사를 맞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많은 수술을 거쳤습니다.

병원에서는 영구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저희 차에는 지금도 노란 장애인 딱지가 붙어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인대와 근골격이 회복되어 가면서 기적처럼 겨우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에 행복해 할 때 즈음. 오랜 병원생활과 장기간 투여한 강한 약으로 인해 내장기관이 망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하루하루 쇠약해져갔습니다.

그제서야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내장기관이 망가지니 음식을 소화시키기가 어려워졌고, 음식을 먹을때마다 더부룩하고 토하는 일이 많아지니 스스로도 식사를 하고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수월하게 할 수 없으니 면역력이 떨어졌고, 면역력이 떨어진 몸에 온갖 잔병치레가 찾아왔습니다.

식사 한끼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조금만 먹어도 바로 토했으며 멀미가 심해 멀리 가지도 못했고, 약해진 면역력으로 인해 생기는 질환을 다시 강한 약으로 다스리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알 수 없는 큰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며칠간 복통으로 인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더군요.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것이 보통 아픈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빨리 병원에 가자고 몇번이나 말해 보았지만 고집을 부리며 한사코 거부하더군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는.

1. 이러다 말겠지.
2. 큰병이면 어떡해(두렵다).
3. 큰병이면 우리 형편에 병원비는?

하는 걱정이었다고 했습니다.

“진짜 큰병이면 빨리 병원 가봐야지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라고 말해도 “괜찮아 질거야.”만 반복했습니다. 물론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통사고 당시의 기억이 크기도 했지만, 혼자 병실에서 흰색 천장을 쳐다보며 지냈던 공포는 남편인 저에게도 말하지 못한 지옥이었다고 합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지옥.

날짜가 지날수록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치료를 한사코 거절했는데, 이미 오랜 병원생활을 겪고 난 뒤라, 병원진료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도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다시 병원생활을 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것이 가장 큰 공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통증수준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베게를 부여잡고 있었고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추스리지 못하고 있는 듯 했지요.

집에서 남편이 뭔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무력하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출근은 해야 했기에 불안감을 누르며 회사로 나갔는데.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간에 아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병원 중환자실 간호사였습니다.

지나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니, 바램이었지만… 괜찮아지지 않았고.

예상했던 대로 큰병이었습니다. 제가 회사에 출근한 사이에

아내는 119 구급대원에 의해 병원으로 호송되어 있었습니다.

2.

병명은 ‘급성 췌장염’이었습니다.

통원치료를 하며 그 고통을 참던 아내는 결국 급성 췌장염에 무너졌습니다. 그 고통은 정말 죽음의 고통이라 부를 정도로 큰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베게를 끌어안고 아파서 울던 아내는 강한 진통제를 맞고 중환자실에 누워있었습니다.

중환자실은 오전오후 면회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병원에 도착한 후에도 한참을 기다려 난생 처음 중환자실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심전도계를 비롯하여 온갖 전선과 기계장치를 둘둘 감고 강한 약에 취해 잠들어있는 아내를 보았습니다. 온몸에는 열꽃이 피어있었고, 치솟는 혈압을 진정시키기 위해 온 몸에 아이스팩을 올리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급성 췌장염은 급성 신부전을 동반하게 되면 사망률이 30%까지 이를 수 있는 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는 특별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물도 못 마시는 금식으로 소화효소 분비와 음식물에 의한 췌장의 활동을 중지시키는 것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물을 포함한 모든 음식물 투여를 일절 중지하고.

생명유지에 필요한 물과 영양분은 모두 링거액으로 투입할 수 밖에 없는 병이었습니다.

또한 병세의 원인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내장질환과 면역력 약화가 원인일 것이다 라고 주치의가 소견을 주었을 뿐이지, 누구도 왜 이 병이 생겼으며 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내려온 후에도 통증이 조금 줄어들었을 뿐, 물 한방울 못 마시는 고통스런 입원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출근을 해야 하는 저로서는 간병인을 두는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본인은 워낙 평소 장이 좋지 않아 뭘 잘 먹질 않았으니 굶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은데,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이 너무 무섭다고 했습니다. 통증이 시작되면 정말 처절할 정도의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며 발버둥을 치는데, 통증이 시작되면 간호사가 와서 바로 강한 진통제를 주어도 약효가 돌기까지의 시간동안에는 고스란히 통증에 노출되었습니다. 보호자는 손을 잡아주거나 등을 쓸어주는 정도의 일 밖에 할 수 없었고, 통증이 너무 심해 수시로 기절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기절하는 것이 낫다 싶을 정도로 너무나 안타까운 광경이 계속되었습니다. 급기야는 스스로 이대로 영원히 잠들었으면 좋겠다. 깨어나서 다시 만나야 할 고통이 두렵다고 이야기 할 정도였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니 병의 완화를 위해 뭔가 금기시 할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원인과 치료법은 알 수 없으나 병의 진행은 명백히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급성 췌장염은 재발하기 쉽고, 재발이 반복되면 만성 췌장염으로 발전하며, 만성 췌장염은 치료가 불가능하고, 만성 췌장염은 성격상 췌장’암’과 맞닿아 있으며….

아시다시피 췌장암은 가망이 없는 병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발전과 함께 성장해 온 현대의학은, 미래학자의 말을 빌리면 10년 안에 모든 질병의 정복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데.

저희 눈에 비친 현대의학은 무기력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두렵기만 했습니다.

완전금식상태에서 링거로만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지라, 너무 많이 맞은 링거주사로 인해 혈관들은 거의 막혀 주사 꽃을 곳이 없어 다리, 발등, 발가락, 손가락 등 거의 모든 곳에 주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각도 못한 곳에 링거를 맞기도 하고, 두세개의 바늘을 꽃고 약 투입이 되는 것을 기다리거나 간호사 두세명이 달라붙어 혈관을 찾기 일쑤였습니다.

그나마도 혈관이 약해 링거를 맞은 혈관이 수시로 터져 바닥이 피투성이가 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습니다. 기본 열번씩 주사바늘을 바꿔 찌르기도 하고, 기껏 찾아낸 혈관이 도망간다며 주사바늘을 꽂은채 몸 속에서 주사바늘을 돌리기도 하고. 그 와중에 아내는 간호사들에게 혈관이 없어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하고….

정말 옆에서 보기에 감당이 안되는 장면들이었습니다.

3.

두번째 중환자실은 1년만에 찾아왔습니다.

다시금 아내의 전화로 소식을 알린 중환자실 간호사의 전화를 받았고.

촬영결과 급성 췌장염이 만성 췌장염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지난번 입원때의 췌장사진을 비교하면서 혓바닥같이 미끈하던 아내의 췌장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울퉁불퉁하게 변해가는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만성 췌장염은 이제 회복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회복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불가능하다는 소견이었습니다.
만성췌장염으로 인해 췌장이 울퉁불퉁해져 가는 모습. 방사선 촬영에서 보이는 형태는 이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병이 점점 깊어지면서 병원생활에 익숙해 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처음에는 1년 간격이었던 재발간격이 6개월, 3개월,등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이제는 통증 예고를 느끼고 미리 택시를 타고 가서 입원하는 경우도 있었고, 입원했으니 갈아입을 속옷 등을 챙겨서 병원으로 퇴근하라는 연락을 받고 집으로 가서 짐을 싸는 일도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익숙해짐이 두려웠습니다. 묵묵히 병원용품을 챙기는 스스로의 모습이 한없이 비참했습니다.

그 와중에 아내는 병실 환자들이 먹지 않는 밥과 반찬을 모아 제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았고.

저는 퇴근하고 병원에서 아내가 모아둔 입원식으로 저녁식사를 한 뒤 도장으로 가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병원생활은 점점 몸에 익어갔지만 생활은 점점 파괴되어갔습니다. 과도한 의료비 지출이 가정경제를 망가뜨렸고, 매번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보는 일로 제 정서도 점점 파괴되어갔습니다. 기절할 정도의 고통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내는 그저 진통제에만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희망이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고통에 저 자신도 이 악몽이 어떻게 끝날지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갈때마다. 혹은 입원할때마다 아내가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다가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과 슬픔과 절망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치료에 지친 아내가 가끔 병원 침상위에서 “죽고싶다” 와 “죽고싶지 않다.” 를 반복하며 울부짖으며 통곡할 때, 이 세상 위에 희망은 이제 더 없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간혹 서울쪽으로 유명한 췌장 전문의를 찾아가 보았지만 췌장 이식수술 같은 극단적인 치료 외에는, 지금 우리가 받는 치료 외에 뚜렷한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이식수술에 해당되는 병변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현대의학은 무력하기만 했습니다.

입원이 반복되고 입원기간이 늘어나면서 마음속에 절망감과 공포가 커져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이키도 수련을 부여잡으며 버텼습니다. 병원에 있어도 보호자가 해 줄만한 것이 없고, 퇴근해서 병원 들러서 식사하고 도장으로 가서 땀을 흘렸습니다. 장기간 이어지는 병원생활에서 함께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수련의 힘이었고, 제 입장에서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몸 곳곳에는 세균 감염으로 인한 희귀성 세포 낭종들이 자라나며 불안한 예후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췌장염과는 별도로 추가 수술을 3번 거쳐야 했습니다.

또한 교통사고 후 세번이나 겪어야 했던 대상포진 중 마지막 포진이 입원 중 찾아오며 고통을 더하였습니다. 손가락 끝 마디마디가 시커멓게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통보를 받았습니다.

4.

아내가 울면서 도장으로 왔습니다.

췌장수치가 내려가고 증세가 완화되어서 퇴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입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만성 췌장염의 고통이 극도에 달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주치의가 아내의 만성췌장염이 이제 췌장암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미 만성췌장염으로 만신창이가 된 아내는 말기 암환자들이 붙이는 마약성 진통패치를 두개씩 붙이면서 버티고 있었고 이미 부분적 항암치료를 시작한 단계였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도 하루 1회 투여하는 몰핀 진통제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 3번 투여하고 있었습니다.

암환자들이 사용하는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패치. 몰핀보다 최대 200배까지 강력하다고 하며. 그만큼 위험성과 부작용도 큰 진통제입니다.

두 눈이 푹 들어가서 얼굴에는 짙게 그늘이 끼어있었고, 주렁주렁 달려있는 링거에 최첨단 디지털 진통제 디스펜서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증세는 점점 심각해져 확정적 암으로 한걸음씩 걸어가고 있는데 뾰족한 치료법도 없이 물 한방울 주지 않고 굶기면서 진통제만 투여하는 것이 무슨 첨단의학이고 현대의학이란 말입니까. 더 이상 병원에 있어봤자 그저 쬐금 덜 고통스럽게 죽는 것 뿐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희씨 지금 퇴원하면 안됩니다! 그러다 정말 큰일나요!”

지금 당장 퇴원한단 말에 주치의는 기함을 하며 말렸습니다.

퇴원을 말리는 주치의에게 지금껏 참았던 울분이 터졌습니다.

“병원에 있어봐야 물한방울 못 마시게 굶기고, 정신도 못차릴 정도로 쎈 진통제만 주사하는것 외에 병원에서 해준게 뭐가있습니까! 사람이 죽어가는데 왜 아픈지도 모르고 맨날 후유증! 후유증!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도 모르잖아요! 선생님이 무슨 의사입니까! 선생님이 뭘 할 수 있는데요!”
저 또한 퇴원을 말리는 주치의와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습니다.
“이게 무슨 현대의학입니까! 이게 무슨 첨단의료냐구요!”

5.

이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혼자 울고 있을때, 옆 침대의 할머니 한분이 아내를 위로하며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아가 왜울어. 젊은사람이 왜그리 서럽게 울어.”

처음보는 할머니에게 아내는 통곡을 하며 신세를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저 이젠 정말 죽어야 하나봐요. 교통사고로 그렇게 긴 세월 치료하느라 보내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하다하다 암이래요.  이제 가망이 없는 듯 해요. 이제 끝이네요.

근데 죽고싶지 않아요. 저는 아직 죽고싶지 않아요.”

한참을 아내를 달래주던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고 합니다.

“나도 17년 전에 췌장암 판정을 받았어. 그런데 아직 살아있잖아? 아가. 병에 집중하지 말고 내일 죽더라도 나가서 하고싶은 것 하고 살아. 오늘만 산다고 생각하고 살아. 내일이란 건 없어. 내일은 생각도 하지 말고 살아. 나도 아직 그 생각으로 살아있잖아? 즐거운것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고 산다고 생각해.”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위로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만 사형선고를 받았던 아내에게는 무슨 계시처럼 느껴졌던 걸까요.

춘천클럽은 마침 2016년 말에, 수련을 이어나가던 태권도장에서 이전요청을 받고 (쫓겨나고) 구사일생으로 강원대학교 아이키도부를 창설하고 강원대학교 체육관으로 수련장을 이전할 수 있었습니다.

강원대학교 도장에서의 첫 수련은 2016년 12월 03일이었고.

췌장암 선고를 받고 병원을 뛰쳐나온 정희씨가 남편이 같이 하고싶어했던 아이키도이니, 내가 죽더라도 한번 해보자 하고 다짐하며 아픈 배를 부여잡고 도장으로 발길을 옮긴 날이 2017년 2월의 일이었습니다.
6.

의사들은 대부분 운동의 효과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정희씨가 겪고 있었던 췌장염은 워낙 오래 앓아왔던 병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병원을 전전하며 주치의도 세번 정도가 바뀌었습니다만 그때마다 “운동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요?” 하는 질문에 “도움이 안됩니다.” 라고 대답하거나 “치료에 악영향을 주고 예후가 더 나빠질 수 있으니 절대로 하지 마시라.” 는 대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머릿속에는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 병원에는 “한국의 온천에 다녀오겠다.” 며 병원을 탈출하여 본부도장에서 항암치료중인 머리를 검은색 비니 모자로 가린 채 유단자들을 마구 날려버리시던 카나야 선생님의 모습과,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아이키도 수련을 통하여 재활에 성공하시고 신촌 본부도장에서 부채연무를 펼치시던 이시바시 선생님의 모습이 자꾸 오버랩 되었습니다. (하긴, 일본 의사들도 운동하지 말라는 것은 마찬가지였군요.)

의사들은 대부분 운동의 효과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것은, 카나야 선생님과 이시바시 선생님과 같이. 아이키도로 병을 극복하신 선생님들의 생생한 모습들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먹고 소화시키는 것에 큰 문제가 없어서 특별히 자각하지 못했지만, 춘천클럽에 입회하신 노년층 회원분들께서는 “아이키도가 정말 장에 좋은 운동이다.” 라고 종종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아이키도가 그 어떤 무술보다 뛰어난 분야인 수신(낙법)은 수련시간 내내 오장육부를 모두 뒤흔들어 놓아, 수련을 하고 나면 아주 속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희씨는 도장으로 복귀한 첫날. 운동을 5분도 하지 못하고 도장 쇼파에 앉아 식은땀을 흘리며 진통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두째날도 수신을 몇번 하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뛰어가 구토를 했습니다.

하지만 2주 정도가 지나고 얼굴색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도장에 들어오기 전에는 파리하거나 허옇거나 하여 핏기 하나 없던 입술 색이.

수련이 끝나고 도장을 나설때즈음에는 마치 화장품을 발라놓은것처럼 새빨간 색으로 변해있었고 볼도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아내는 반신반의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느낄 수 없어도 남편이 보기에 혈색이 돌아온다고 하니 조금만 더 참고 수련을 더 이어나가보기로 했습니다.

한달이 지나자, 수신을 하고 도장에서 구르고 나면 ‘배가 덜 아픈 것 같다 .’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련을 쉬면 다시 아플것 같은 불안감에, 몸이 안좋고 배가 아픈 날에도 정희씨는 수련을 집요하게 참석하였습니다. 저 또한 그 안타까움을 누구보다도 이해하여 가능한 쉬는 날 없이 수련을 열었습니다.

아직 병세가 가득한 채로 수련하는 이정희 회원의 모습. 대학부 윤인상군에 따르면 “수수깡 같았다.” 라고 합니다.

석달정도 지나고 정희씨의 수련일수가  한달에 20일 가까이 되자, 맨 먼저 암환자들이 사용하는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 패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땀을 흘리니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지만, 땀을 흘릴 정도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자 통증이 잦아들어 더 이상 붙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담당 주치의와 싸우고 강제로 퇴원할 당시에는 장바구니로 한바구니가 넘는 어마어마한 양의 약을 받아왔고, 한달에 한번 정도 다시 병원에 가서 진통제 링거를 맞는 날이 있었습니다만 2017년이 저물기 전에 이것도 모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통증이 점점 줄어들면서 거의 아프지 않게 되자 강한 진통제와 약한 진통제가 순차적으로 떨어져 나가고 급기야 2018년 초에는 우습게도 10년 넘게 복용하던 변비약까지 모두 끊게 되었습니다.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 후의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통증의 공포를 겪으며 병원 침대에서 둘이서 손을 붙잡고 엉엉 울던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7.

부작용도 있습니다.

이제는 관심사가 통증, 췌장염, 췌장암이 아니라 아이키도의 기술로 옮겨갔습니다.

스스로 기술 욕심을 내다보니 운동량이 엄청나게 늘었고 근 십년간 거의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배고프다’ 는 하소연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병환에 시달릴때는 ‘배가 아파 죽을 것 같다.’ 에서 지금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 로 옮겨갔습니다.

체중이 10킬로그램 정도 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정확한 몸무게 공개는 필사적으로 거부합니다.) 민소매와 반팔을 입고 있으면 팔다리에 힘줄과 잔근육이 관찰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주 보기좋은 몸매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차를 타고 멀리 이동하지 못하였고, 서울이라도 다녀올라치면 하루 다녀와서 일주일을 앓아눕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지금은 편도 500킬로미터가 넘는 주말여행을 수시로 다니며 화장실 다녀오는 것 빼고는 크게 쉬는것도 없이 엄청난 장거리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체력이 부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회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아이키도 기술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 지역강습회와 국제강습회를 의욕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원대학교 중앙동아리 소개때는 연무를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국제강습회 네타임을 풀로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붙었습니다.

강원대학교 총동아리연합 신규 중앙동아리 심사에서 연무를 펼치고 있는 이정희 회원.
경기도 안양강습회에서 윤대현 선생님과 여성회원들.
정희씨 그러다 큰일난다고 계속 소리치던 주치의는 최근에 다시 만난 정희씨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혹시…정희씨?” 하며 확인하던 주치의는 “세상에! 뭘 한거예요? 어떻게 한거예요?” 하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립니다.
검사결과와 췌장수치를 보고서도 “이럴수가 없는데…이런일이 있을수가 없는데…아닌데…” 하며 연신 고개를 갸웃갸웃 합니다.
계속 번지고 자라나서 절대 운동하지 말라고 또 다른 주치의가 신신당부하던 가슴의 종양도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긴 합니다만 더이상 커지지 않고 있습니다. 암으로 전이되지도 않았습니다.

대상포진으로 까맣게 죽어갔던 손가락 끝이 이제는 집게손가락을 제외하고 다시 제 색상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체지방률은 크게 줄고 근육량은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면역력이 크게 높아졌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정희씨는 개인통산 300일 수련을 맞았습니다.

300일 수련 기념케익

8.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정희씨는 병마를 모두 벗어버리고 지금까지의 인생 중 최고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우환이 사라지고 나서 더욱 행복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한번 잃어버렸던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희 부부는 이 기적같은 사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부부는 의학은 잘 모르지만, 아마 의학적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내 정희씨는 아이키도의 치유효과를 자신의 생명으로 체험한 장본인으로서,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키도의 특별한 치유효과를 역설하고 다니는 아이키도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아이키도가 나를 살렸다. 남편에게 감사한다.” 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도장은 병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련하는 것은 무술이지 의료행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치료와 회복효과를 볼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부부가 체험했던 기적과도 같은 회복은, 화합과 상생의 무술. 상대를 해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아이키도에 딱 어울리는 기적이 아니었는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나야 선생님과 이시바시 선생님을 떠올리며, 그 기적이 저희 부부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아마 제가 알고 있지 못하는 더 많은 환우들과 훨씬 더 많은 도우들이 아이키도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활력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단순히 부부 사이가 좋아지는 것을 넘어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정희 수련생 또한 도장에서는 초심자들의 믿음직한 선배이자 여성 수련생들의 맏언니 노릇을 톡톡히 하는 클럽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땀흘려 수련하며 자신이 익힌 아이키도로 큰 병을 이겨낸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여러 회원들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표현하여 많은 분들에게 보여드리는 것을 조금 민망해 했습니다. 세상에는 더 신비로운 일들과 더욱 경이로운 기적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키도를 통해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후, 조금 더 많은 분들이 아이키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찾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부끄럽고 부족하지만 글로 옮겨봅니다.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글쓴이>

이우림 (아이키도 춘천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