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1] 사카모토 료마

1. 혈기방장한 탕아, 큰 바다를 만나다(유년기~청소년기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김구 선생…
한국인들에게 ‘존경할 만한 역사적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가장 쉽사리 떠올릴 인물들일 것입니다.
언론지면에 흔히 소개되는 ‘한국인이 존경하는 위인’의 순위를 매긴 기사에서도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역시 이러한 결과에 쉽사리 수긍하리라 믿습니다. 그만큼 이 분들이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들의 삶의 지표로 삼았던 철학과 그들이 남긴 업적은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를 전해주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일본인들에게 이처럼 ‘존경할 만한 역사적 인물’을 묻는다면 어떤 인물들이 거론될까요?

언론 매체에 보도된 내용을 살펴 보면, 크게 두 인물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 중 한 인물은 16세기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인물로 평가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이고, 다른 한 인물이 바로 이번 칼럼에서 다루고자 하는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 1836-1867)입니다.

이 가운데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의 지방 영주(다이묘大名) 출신으로 우다이진(右大臣)이라는 고위직에 임명되었고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위치에 섰던 인물입니다. 반면 사카모토 료마는 외교 활동을 하거나 무역회사를 운영하기는 했지만 강한 권력이나 높은 지위를 얻었던 인물이 아니었으며, 에도 시대 말기 원수지간이던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두 번을 화해시켜 메이지 유신이 실현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선중팔책’이라는 문장을 통해 일본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다음 젊은 나이에 암살당한 인물입니다.

삼십년이 조금 넘는 생애를 굵고 짧게 살다간 이 인물이 역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소프트뱅크 손 마사요시(孫正義) 대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가를 이번 연재를 통해서 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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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고치현의 관광명소 가쓰라하마(桂濱) 해변. 경치가 아름다운 명소인 이 곳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기념관과 동상이 소재해 있다. (출처: 고치현 관광컨벤션협회 웹사이트. http://visitkochijapan.com/)


공부 못 하던 부잣집 도련님
, 검술 유학을 떠나다.

사카모토 료마는 1835년, 오늘날 일본 고치(高知) 현 에 해당하는 도사(土佐) 번²에서 태어났습니다.
2남 3녀 가운데 막내였지요. 시코쿠(四國) 섬에 위치한 도사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도사견의 원산지이지요. 사실 료마의 조상들은 본래 무사 집안이 아니라, 상업에 종사하던 평민이었습니다. 그러다 전당포와 양조장을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던 그의 조상들이 18세기 후반에 하급 무사 계급의 하나였던 고시(鄕士) 자리에 오르면서 사카모토 집안은 하급이라고는 하나 무사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카모토 집안의 재력은 도사 번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카모토 료마는 상당히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자면 최소 은수저 이상을 물고 태어난 인물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합니다.

훗날에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그 와중에 역사에 길이 남을 명 문장을 남기기도 한 료마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공부와는 완전히 담을 쌓은 아이였습니다.

서당에 입학했다가 며칠도 못 버티고 뛰쳐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료마가 살아가던 시대는 에도 시대, 즉 공부를 잘 못해도 검술로 인정받을 수 있던 시대였고, 집안도 부유했기에 이런 그를 얼마든지 뒷받침해줄 수 있었습니다.

서당 공부에는 재미를 못 붙였지만 운동에는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지 료마의 부모는 료마를 서당 대신 검술 도장으로 보냈고, 그는 도사 번에서도 인정받는 검술가로 성장해 갑니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마침내 번의 허락을 얻어, 당시 에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도장인 현무관(玄武館)으로 검술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이 시대만 하더라도 일본은 무사가 지배하던 사회였던데다 번주의 허락 없이는 번을 떠나기도 힘들었던 봉건시대였던만큼, 료마의 현무관 유학은 오늘날로 치면 아이비리그 유학에 버금가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무관에서 료마의 실력을 증명해 줄 현존하는 자료는 그가 나기나타 목록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문서 뿐입니다. 다른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그가 현무관에서 정확히 어떤 위상을 차지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나기나타 목록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는 상당한 수준에 다다른 검술가이지 않았을까 하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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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가쓰라하마 해변의 사카모토 료마 동상 (출처: 고치현 관광컨벤션협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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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오늘날의 고치현 지도. 옛 지명인 도사가 현 내의 도사 시 지명에 남아 있다. (출처: 인터넷 두산백과 고치현 편)

 

혈기에만 사로잡혔던 운동권 청년,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가 청소년기를 보낼 무렵, 일본은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1854년 미국의 압력 하에 개항을 한 일본 사회는 마치 구한말의 우리나라처럼 개항파와 보수파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도사에서는 존왕양이를 부르짖던 소장파 무사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 1829-1865)이 도사 근왕당을 조직하고는 번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다케치 즈이잔의 후배였던 료마는 에도에서 도사로 돌아와 ‘근왕(勤王)’이라는 이상에만 이끌려 근왕당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도사 근왕당은 과격한 언동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던데다, 결정적으로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가 개입하면서 결국 세력을 잃어버립니다.
다케치 즈이잔의 실각이 눈앞에 다가왔을 무렵, 혈기방장한 료마는 ‘나라를 구한다’라는 뚜렷하지 못한 대의 하나만 믿고 탈번(脫藩)하여 에도로 향합니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 사무라이나 백성이 번주의 허락 없이 번을 벗어나는 행위였던 탈번은 사형으로 다스리던 중범죄였지만 에도 말기였던 이 무렵에는 탈번을 적당히 눈감아주던 풍조가 만연했고, 탈번 무사가 된 료마는 종종 집에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어설프고 혈기방장하기만 한 대의를 가족들에게 설교조로 늘어놓는다거나 용돈이 떨어졌으니 돈 좀 부쳐 달라고 요구하는 등의 ‘철부지’같은 행동도 꽤 하였습니다. 그러다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이자 부패한 역적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막부의 해군 담당 고위 관직이었던 해군부교(海軍奉行)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암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사실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이 시기에는 정치적 이유로 막부의 관리들이 암살당하는 일이 적잖이 일어나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가쓰 가이슈 암살이라는 ‘거사’에 성공했다면, 그의 인생은 일개 살인범으로 끝났거나 또는 에도 말기의 수많은 암살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묻혀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료마는 가쓰 가이슈와의 만남을 통해, 혈기만 믿던 무모한 청년에서 일본의 역사를 바꾸어 갈 거목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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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도사 번주 야마우치(山內) 가문의 거성, 고치성(高知城) (출처: 고치현 관광컨벤션협회 웹사이트)

 

바다를 꿈꾸던 스승과 함께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로 나아가다

‘천생연분’, ‘찰떡궁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부부나 연인의 사이를 표현하는데 쓰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부부나 연인의 사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가 굉장히 잘 어울리고 또 쓰여야 할 법한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와 가쓰 가이슈가 바로 그런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객을 마주한 가쓰 가이슈의 태도는, 료마의 예상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는 료마에게 일본의 미래를 위해 젊은이가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며 료마를 타일렀고, 가쓰에게 감화된 료마는 결국 칼을 내려놓고 그의 문하생이 됩니다.
에도 막부의 미국에 처음으로 보낸 사절단을 태운 배의 선장으로 미국에 다녀온 가쓰는 ‘海舟’라는 그의 호가 보여주듯 바다에 많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고, 료마는 그가 서양식 해군 양성을 목표로 고베 근처에 세웠던 해군조련소의 핵심 인물이 됩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혈기만 믿던 무모하기 짝이 없던 사카모토 료마라는 청년에게 책임감과 통찰력,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확실하게 심어주게 됩니다.

정치에 대해서도 비로소 눈뜰 수 있었지요.
스승의 호인 ‘가이슈(海舟)’가 ‘바다 위의 배’라는 뜻이니, 그는 이 시기를 계기로 가이슈라는 큰 배를 타고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무렵의 사카모토 료마는 법적으로는 도사 번을 무단으로 탈번한 수배자 신분이었습니다.
막부 말의 혼란한 상황, 그리고 막부의 관료였던 스승 가쓰 가이슈 덕분에 도망자 신세 대신 해군조련소의 실세로 일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막부 내에서 개혁파 인사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해군조련소는 1864년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개혁파의 지지를 받던 가쓰 가이슈가 해군부교직에서 해임되었기 때문이었지요. 이 때문에 사카모토 료마도 하루 아침에 갈 곳 없는 신세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지만 1년 남짓한 기간동안 사카모토 료마는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격동하는 시대는 그를 더 넓은 무대로 불러내게 됩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어떤 활약을 벌이며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가에 대해서는, 이어질 연재를 통해서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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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가쓰 가이슈(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인물-가쓰 가이슈 편)

 


¹. 본 연재는 필자가 번역(공역)한 다음 책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손일·이동민 역, 2014,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푸른길(원서: Jansen, M. B. 1971. Sakamoto Ryōma and the Meiji Restoration.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². 번(藩)이란 일본 에도시대의 지방 행정구역을 의미하며, 지방영주인 다이묘(大名)의 세습 통치를 받았음.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1년에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조치인 폐번치현(廢藩置縣)에 의해 오늘날 일본의 각 현들로 통폐합되었음.

 

 

[기획 연재]사카모토 료마

 

1부. 혈기방장한 탕아, 큰 바다를 만나다(유년기~청소년기)

2부. (삿조동맹 체결과 해원대 활동)

3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하늘로 돌아간 젊은 거인(메이지 유신과 료마의 최후)

4부. 꿈과 평화의 상징, 사카모토 료마

5부. 검술가, 무도가로서의 사카모토 료마

6부. 사카모토 료마는 어떻게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될 수 있었는가?

 

이동민 사진chs

저자 소개

이동민

대구교육대학교 졸업(200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교육학박사, 2014)

전) 대구교육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현)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초빙교수

한국교원대, 서울교대, 서울대, 공주대, 전남대 등 출강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한국번역가협회 정회원

주요 저역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역서, 2013, 논형)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공역, 2014, 푸른길)

『지리의 모든 것』 (역서, 2015, 푸른길)

주요 연구업적:

How to design and present texts to cultivate balanced regional images in geography (Journal of Geography, 2013)

Mindful learning in geography: Cultivating balanced attitudes toward regions (Journal of Geography, 2015)

이동민
대구교육대학교 졸업(200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교육학박사, 2014) 전) 대구교육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현)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초빙교수 한국교원대, 서울교대, 서울대, 공주대, 전남대 등 출강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한국번역가협회 정회원 주요 저역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역서, 2013, 논형)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공역, 2014, 푸른길) 『지리의 모든 것』 (역서, 2015, 푸른길) 주요 연구업적: How to design and present texts to cultivate balanced regional images in geography (Journal of Geography, 2013) Mindful learning in geography: Cultivating balanced attitudes toward regions (Journal of Geography, 2015) E-mai: dr.dongmin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