合氣道 쟁점 묻고 답하기(2)

Questions and answers web and Internet concept with q and a letters and sign on hanged tags isolated on white background.

(계속)

 

A : 우에시바의 북해도 거주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우에시바는 1883년 12월 14일, 現와카야마현 타나베(和歌山県 田辺市)에서 태어났습니다. 1912년, 청년 우에시바는 정부에서 모집한 북해도(北海道, 홋카이도) 개척이민에 단장 자격으로 출신 지역민을 이끌고 現몸베츠군 엔가루(紋別郡 遠軽町*)로 이주합니다.

* 정(町)은 일본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군(郡)의 하부 단위에 해당

 

그리고 1915년 북해도 지역 신문기자였던 요시다 코타로(吉田幸太郞, 1883~1969)의 소개로 엔가루의 히사다(久田) 여관에서 다케다 소가쿠(武田惣角)를 만나 다케다에게 대동류합기유술을 배우기 시작합니다(두 사람을 소개한 요시다 코타로는 훗날 극진공수도 최영의 총재에게 대동류를 지도했습니다.).

 

1916년 우에시바는 다케다로부터 대동류합기유술 비전목록(秘傳目錄)을 받았고, 다케다의 순회지도에도 함께 합니다.

 

1919년 12월,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은 우에시바는 급히 귀향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1920년 1월 사망) 집에 도착합니다. 그 이유는 귀향 도중 교토(京都)의 아야베(綾部)에 들러 며칠을 보냈기 때문인데, 우에시바는 집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 대단한 치유력을 가진 종교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 아야베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오모토교(大本敎, 神道의 일종)의 거물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郎, 이하 데구치)였습니다. 데구치에게 깊은 감흥을 얻은 우에시바는 고향에서 아야베로 이주해 오모토교 수행에 들어갑니다. 우에시바가 경험한 종교적 깨달음은 나중에 그가 만유애호(万有愛護)의 정신을 담은 合氣道를 창시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지요.

 

1920년 우에시바는 아야베에 도장 우에시바숙(植芝塾)을 열고 대동류합기유술을 지도합니다. 그리고 1921년에 삼남이자, 훗날 2代 道主가 되는 우에시바 기쇼마루가 태어납니다(장남과 차남은 1920년 사망).

 

우에시바는 1922년 다케다를 아야베에 초대해 5개월 여 동안 대동류합기유술을 함께 지도했으며, 같은 해 9월 대동류합기유술 교수대리(敎授代理)를 받습니다. 당시에 교수대리는 다케다가 발행하던 자격에서 최고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1924년 우에시바는 데구치와 함께 ‘오모토교의 힘으로 이상 국가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몽골로 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합니다. 당초 계획은 중국 군벌 장작림(張作霖, 1875~1928, 일명 東北王, 장학량<張學良>의 아버지), 장작림의 객장 노점괴(盧占魁, 마적단 두목, 서북자치군총사령)와 협력해 데구치를 중심으로 자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적단의 힘이 커지면 배신하지 않을까 우려한 장작림이 변심해 노점괴와 일행을 처형합니다. 우에시바와 데구치는 이를 피해서 탈출했다가 결국은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았고,  일본영사관이 나서서 장작림 측과 교섭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우에시바는 당시 군벌의 추적을 피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는 각성을 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노점괴가 장작림에게 처형당한 사건이 192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군요. 기사에 나오는 왕인삼랑(王仁三郎)이 데구치 오니사부로입니다. 우에시바 이름은 없지만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기사 주소를 첨부합니다.

 

일본으로 돌아온 우에시바는 1927년 도쿄(東京)로 상경해서 1931년 지금의 신주쿠(新宿) 지역에 도장 황무관(皇武館, 코부칸, 이하 황무관)을 만들었습니다. 이 무렵 우에시바는 다케다와 서서히 거리를 두면서 기존에 수련했던 여러 종류의 무도*, 종교적 깨달음, 생사를 넘는 과정에서 깨어난 새로운 경지의 감각을 융합해 한창 자기만의 무도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우에시바 기쇼마루著 『合氣道』를 포함해 다른 合氣道史 자료를 살펴보면 우에시바는 기토류(起倒流, 유술), 텐진신요류(天神真楊流, 유술), 야규류(柳生流, 유술), 호조인류(寶藏院流, 창술), 유도(柔道), 대동류유술(大東流, 유술), 신카게류(神陰流, 검술) 등 여러 종류의 무도를 연마했습니다.

 

1940년 우에시바는 후생성(厚生省)에서 재단법인 황무회(皇武會, 코부카이, 이하 황무회)를 인가 받습니다. 황무회는 現합기회의 전신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황무회는 정부 외곽 단체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 이하 무덕회)’*의 전시 통제를 받게 됩니다. 무덕회는 대일본학도체육진흥회(大日本学徒体育振興会), 강도관(講道館, 코도칸), 일본고무도진흥회(日本古武道振興会), 대일본검도회(大日本剣道会) 등을 통제하면서 편의상 검도(剣道), 유도(柔道), 총검도(銃剣道), 사격도(射撃道)처럼 일정한 명칭을 정하고 그 밑에 비슷한 유형의 무도를 모아 총괄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때 우에시바의 무도가 새로 만든 합기도부(合氣道部)에 들어갑니다. 이전까지 우에시바는 자신의 무도를 합기유술(合氣柔術), 우에시바류(植芝流), 합기무도(合氣武道)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르다가<이 시기 정착된 이름은 合氣武道였음> 무덕회 통제를 계기로 合氣道로 호칭하게 됩니다. 합기회가 공식 자료에서 ‘1942년부터 合氣道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뜻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게 다수설(多數設)이자 통설(通說)인 것 같아요.

* 일본 제국주의 시절이던 1895년 무도단체를 총괄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일본 패전 후인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부(SCAP: 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 GHQ: General Headquarters / 일본어 명칭 : 聯合國軍最高司令官總司令部, 이하 GHQ)의 지령에 따라 해산

 

한편, 우에시바는 정부의 통제에 반발해 우에시바 기쇼마루에게 황무관 운영을 맡기고는 이바라키현 이와마(茨城県 岩間町)로 이주해 은거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943년 이와마에 합기신사(合氣神社)를 건립하는데, 여기에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 1897∼1970, 고종의 칠남,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 많은 자금을 후원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1948년, 우에시바 기쇼마루가 황무회를 합기회로 개명하며 문부성(文部省) 인가를 받습니다. 창시자 우에시바가 입문 조건을 엄격히 하고 수련을 비공개로 진행했던 것과 달리 우에시바 기쇼마루는 合氣道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아버지가 창시한 무도를 대중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合氣道계에서는 合氣道가 지금처럼 널리 알려진 데에는 우에시바 기쇼마루의 공이 크다고 평가합니다.

 

우에시바는 1969년 지병으로 별세했고, 우에시바 기쇼마루가 道主를 승계(2代)했습니다. 현재는 3代 道主 우에시바 모리테루(植芝守央, 1951~ )가 창시자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Q : 상당히 길군요. 일본에서 合氣道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어느 지점과 연관이 있습니까.

A : 우에시바의 약력에서 꼭 언급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정리했는데도 이렇습니다. 그럼 ‘1942년 무덕회 합기도부 창설’과 ‘1948년 합기회 인가’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