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아이키도’ 3. 제1장 태어나(2)

제3절 유도柔道 입문

제가 무도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3,4년이 지난 즈음의 일입니다.

저희 집 앞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거기에 근무하고 있던 경관이 짬이 많았는지 저희 집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얘기를 듣자니 큐슈九州출신인 그는 유도로 날렸다는 겁니다. 고향에서는 나름의 성적을 갖고 있다며 자랑했습니다.

유도인가.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郞’* 등의 영화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에 유도에의 동경이 샘솟았습니다.

★’7인의 사무라이’, ‘라쇼몽’ 등으로 유명한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의 1943년 데뷔작으로 유도를 소재로 함.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

「너, 유도 해보지 않을래?」

손위 형이 그런 제 마음을 꿰뚫어본 듯이 얘기했습니다.

형제 사이에서도 제 바로 위의 형은 기가 어찌나 센지 학교에서 ‘이제 오지마’라고 할 정도로 희한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머리도 비상하게 좋아서 뭐든지 걱정 없습니다. 거기에 반해 저는 내성적이라 걱정거리였던 거죠.
시골에 피난했을 때 요즘으로 따지면 이지메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동생을 채찍질하는 의미에서 형은 유도를 권한 겁니다.

그런 연유로, 저는 유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소는 코지마치麹町 경찰서입니다. 거기서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쟁 직후에는 무도금지령이 내렸다고 보통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경찰에서 유도를 가르치거나, 코도칸講道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금지령이 내렸던 건지 저로서는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저는 신학기부터의 스타트가 아니고 말하자면 중간에 입학한 것이라, 가르치시는 경찰관 선생으로서는 다른 아이들이 먼저 진도가 나가있는데 저만 수신受け身, 낙법 따위부터 가르쳐야만 되는 등 귀찮은 상태였습니다.
그 귀찮음도 얼마 가지 않고 곧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너, 재능이 없으니까 돌아가’라고. 울면서 경찰서를 뒤로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꼭 경찰서에서만 유도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가까운 곳에 코도칸이 있으니까, 거기서 해보는 건 어떠냐?」

당시 스이도바시水道橋 역 가까이에 코도칸이 있어서 제 집에서는 걸어서도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음을 풀고 코도칸에 입문하여 매일 유도에 열중했습니다.

6학년 때는 1주 단위로 급격하게 몸에 살이 붙었습니다.
유도에서는 몸이 큰 편이 유리합니다. 기뻐하고 있는데 친구가 ‘너 이상하다, 병 있는 거 아냐’라고 말했습니다. 듣고 보니 몸이 나른합니다.
살이 붙은 게 아니라 부었던 겁니다. 이이다바시飯田橋에 있던 경찰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신장에 병이 났으니 바로 입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말하니 「그런 돈은 없다」는 한마디. 다시 의사에게 가서 입원은 돈이 없어 안 된다고 전했습니다.

의사는 「너 죽는다」라고 을렀습니다. 저는 울면서 「죽기 싫어요」라고 외쳤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절대로 지킬 수 있겠나?」
「뭐든지 할게요.」
「좋아, 수박만 먹어라, 다음은 소금을 넣지 않은 채로 찐 야채만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수학여행은 못 갔지만 그대로 따랐더니 건강해졌습니다.

마침내 저도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제가 입학한 곳은 코지마치 중학교입니다만, 가게가 바쁘면 도와야 했기에 학교는 갔다가 말았다가 했습니다.
잡화상이 된 아버지가 나막신의 판매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집 뒤편이 홍등가였습니다. 거기서는 오동나무 나막신을 대량으로 주문합니다.
도치기의 어머니 친정에서 나막신을 가져와서는 숫돌가루를 칠해서 광을 내고 왁스를 칠해서 한 번 더 광을 내고는 끈을 달아 완성입니다.

저는 숫돌가루를 칠해서 말리고, 광을 내고, 다시 왁스를 칠하고, 다시 광을 내는 역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막신 끈을 달면 완성입니다.
몇백 개나 되는 나막신을 상대하느라 학교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참으로 단조롭게 숫돌가루만 칠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학교는 쉴 지언정 도장에는 다녔습니다.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유일한 기분전환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4절 어머니의 죽음

중학교 때 일어난 슬픈 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당시 만연해있던 이질에 걸려, 코만바駒場에 있는 격리병동에 입원했습니다.
전후의 혼란과 식량난, 그리고 비위생을 원인으로 한 법정전염병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어느 날, 파출소에서 저희 집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댁의 아주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당시엔 전화 따위가 없었기 때문에 경관이 저희 집까지 걸어와 알려주시게 된 겁니다.

저에겐 어머니의 장례식에 간 기억이 없습니다.
법정 전염병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보러 갈 수 없어 슬펐습니다.

그때부터는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은 괴로움을 견디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저희 코지마치 중학교는 현재에도 명문이지만 당시부터 학업에 힘을 쏟아 학생의 시험 결과를 복도에 게시하였습니다.
제 손위 형은 수재인지라 매번 시험에서 학년별 3등 이하로 내려간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의 동생이라는 게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에게 알려져 은밀히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한 일이지만 저는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애시당초 공부 따위에 흥미도 관심도 없는데다가, 나막신 만들기에 바쁜 때에는 학교를 쉬었기 때문에 성적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역시 형 만한 동생은 없는 건가.」 선생님으로부터, 자주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이런 상태인지라 아버지의 기대도 자연히 형에게 향했습니다. 나중에 형은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로부터 장학금을 받으며 취직했습니다.
거기서 공학박사와 농학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이런 두 가지 상이한 부문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일본에서 박사제도가 시작한 이래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였습니다.

타입이 다른 형들이었지만 저희 형제자매들은 모두 사이가 좋아,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돕습니다.

이런 가족이었지만, 저는 아버지의 장사꾼으로서의 재능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전쟁의 재앙을 입은 곳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전쟁 전의 집은 기둥이나 대문에 동판銅版을 많이 사용했는데, 아버지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폐품이 되어버린 동판을 어디서 모아 와서는 마당이나 나무 밑에 보관해두었습니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화폐경기가 활발해져 동판의 가격이 상승하여 아버지는 큰 이익을 취했습니다.

부친의 미래를 꿰뚫는 선견지명과 재능에 저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덕분에 저희 집은 경사스럽게도 가게를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성주환
대한합기도회 본부 지도원. 인천 삼성당 도장장. 1997년 입문. 前 경찰대학 아이키도부 주장. 2013년 월드컴뱃게임즈 한국대표 인천시청역 1번 출구 도보 1분. 화목 21시, 토 10시. 문의 032-464-08340, AikidoKR@naver.com 블로그: http://AikidoK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