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아이키도] 제1장 태어나(1)

제1절 구단九段으로 태어나

제가 태어난 것은 1936년 9월 20일, 장소는 도쿄 쿠단자카우에東京 九段坂上로, 야스쿠니靖國 신사 바로 앞입니다.

1936년은 아시다시피 2․26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그 해 2월, 친가가 있던 쿠단자카우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등지고 삼면이 비탈인데 군인들이 기관총을 들고 둘러싸서 긴장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1,483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으킨 반란사건. 그들은 일본의 탐관오리들이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으므로 모든 권력을 쇼와 덴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보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3일 만에 투항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며 폭주하게 된다.

당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銀이 일본 육군 대좌로서 근처에 있던 우츠노미야 59연대 연대장이었기에 반란군 진압을 위해 상경해 이들과 대치하기도 했다.

저는 8형제의 5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들 여섯, 딸 둘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는 일찍 죽고, 또 바로 아래의 동생은 전쟁이 끝나던 날 죽어서 모두가 무사히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고바야시 가네시로小林金四郎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토치기栃木에서 단신으로 동경에 와서 노력 끝에 동경 쿠단에 쌀가게를 차린 사람입니다.

평상시에 말이 없어,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특히 무서웠다는 기억도 없고, 화를 내신 기억도 없습니다. 뼛속부터 장사꾼으로 당시는 쌀이 잘 팔리던 때라 거기에 전재산을 거시기도 하였습니다.

배운 건 없었지만 장사에 관해서는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당시에는 가업도 순조로와 집도 풍족했습니다. 아버지는 근위사단의 식량도 공급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는 잘 풀렸습니다.

저희 8명 형제자매는 이리저리 한 명씩 유모나 여시종이 있을 정도로 매우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유소년기에는 가난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놀았던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어머니 토쿠トク는 소문이 자자한 미인이었습니다. 사진이 남아있는데 확실히 아름다우면서도 기가 세어 보이는 얼굴입니다.

강단 있는 사람이지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식량난, 비위생적인 시절에 아이 다섯을 키우다 무리가 와서 이질로 돌아가셨습니다.

제2절 종전 그리고 암시장

이런 풍족한 환경을 급변시킨 것은 전쟁입니다.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이 개시되면서 경제가 통제되어 쌀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쌀가게는 당연히 경영이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특히 동경대공습 때의 것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1945년 3월 10일의 도쿄대공습으로 미국의 비행기가 소이탄燒夷彈을 비처럼 퍼부어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저는 방공호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불꽃같은 소이탄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습니다.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식량난입니다.

토후쿠東北 지방에 피난한 아이들은 아직은 쌀을 먹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후지 요시다富士吉田는 후지산富士山의 자락에 있어 작물이 나기 어렵고 먹을 것이 없어 8할이 콩인 헛밥이었습니다.

저희들은 나날이 이어지는 공습에는 견디었으나 배고픔에는 견딜 수 없어 떨어진 떫은 감을 입에 대거나 혹은 옥수수를 생으로 갉아먹거나 했습니다.

옥수수를 생으로 먹으면 맹렬한 설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 참으며 갉아먹었습니다.

당시 저는 코가 안 좋아 콧물을 달고 다녔는데, 아버지가 코푸는 휴지로 전화부 한 권을 갖고 오셨던 것을 희한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피난한 아이들에겐 부모가 가끔 만나러 옵니다. 그때 아이가 식사를 못해 심하게 약해져 있거나 하면, 부모가 손을 이끌고 돌아가거나 한 적도 있습니다.

형이 병이 나 아버지가 병문안을 왔는데 확실히 쇠약한지라, 형은 아버지와 함께 도쿄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원체 건강한 저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절을 임시교실로 썼습니다만 수업 따위 될 리가 없습니다.

야채를 심거나 놀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일 같이 B-29가 후지산을 기점으로 저녁에 날아와 좌우로 흩어져 날아갔습니다.

한쪽은 도쿄, 한족은 오사카 방면으로. 그런 날은 밤이 되면 도쿄 방면의 하늘이 붉게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1945년의 8월 15일을 맞았습니다.

저희 어린이들은 땡볕 아래에 나란히 서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덴노의 방송을 들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랬겠지만,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른이나 선생님이 울고 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전쟁도 끝나고 피난도 그 시점에 종료되었습니다. 도쿄에서 어린이들의 부모들이 차례차례 와서 아이들을 이끌고 돌아갔습니다.

부모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정말로 부러웠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빨리 안 오나’하고 기다렸습니다만 오는 것은 다른 아이들의 부모들뿐이고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 편지를 써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어머니의 피난처 주소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리저리 하다보니 남은 것은 저를 포함한 3명의 아이들뿐이었습니다.

저 이외의 2명은 부모 모두 공습으로 사망, 고아가 되어 데려갈 사람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2개월 후, 드디어 제게도 어머니가 여동생을 이끌고 데리러 오셨습니다. 여동생이 입고 있던 빨간 스커트가 지금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종전 직후 여러가지로 바빠 오는 것이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도치기 현栃木県 사노 시佐野市에 갔습니다. 도쿄는 식량난으로 이주가 제한되어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어머니의 친정에 있는 창고가 집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영양실조 상태였습니다.

하루 종일 앉은 채로 아예 움직이질 않습니다.

눈도 멍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안색도 극단적으로 나빴습니다.

어쩐지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걱정하여 의사에게 진찰을 받도록 하니, ‘극도의 영양실조’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야마나시 현山梨県의 피난처에서 먹을 것이 없었던 저는 심신 모두 허약해졌던 겁니다.

이것만은 먹을 것이 없는 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요리를 먹으며 며칠이 지나자 제 몸도 원래대로 건강해졌습니다. 사노시의 소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제 바로 윗형과 둘이서 쿠단의 폐허 위에 판잣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쌀은 배급제로 바뀌어서 이제 제대로 된 쌀가게를 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친정이 사노에서 큰 잡화상을 하고 있었기에 거기서 물품을 조달하여 잡화상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잡다한 물건들을 취급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제 바로 손윗형에게 종업원을 시켰습니다.

형은 종업원 일을 하면서 학교의 교과서를 잘 읽었습니다. 종전 직후라 책 따위 없는 시절입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학교에서의 성적이 톱이었습니다.

그렇게 우수한 형에게 아버지도 기대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저희 가족이 쿠단에 돌아와 같이 살게 된 것은 1년 반 후,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입니다.

아직 물자가 없는 전쟁 후의 혼란이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5명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필사적이었습니다.

잡화상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자 예의 쌀가게 경험을 살려 암시장闇市場에서 쌀을 거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아버지와 함께 암시장에 쌀을 팔러 갔습니다.

왜 아직 어린 저를 데려갔냐 하면, 경찰의 암시장 단속을 생각한 것입니다.

암미闇米를 파는 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쌀을 압수당하고 벌금을 물게 되지만, 아이라면 봐줄 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버지의 속내였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둘이서 평소처럼 거래를 하러 갔는데, 운이 나빠 경찰에 발각되어 버렸습니다.

들킨 건 저였습니다. 손에 암미를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띈 것입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경관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습니다. 제 바로 옆에 아버지가 서있었습니다.

얼굴 생김새도 꼭 닮았기에 모를 리 없었겠지만, 경관은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 것이겠지요.

그러자 아버지는,「몰라요, 이런 애는.」이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어린애니까 설마 체포까지는 하지 않으리라 아버지가 계산한 거라 생각하지만, 제게 있어선 정말로 쇼크였습니다.

그때 가장 사랑하던 아버지가 저를 모른 척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제 속에 작은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때로는 혼자서 암미를 거래하러 간 적도 있습니다.

저희들은 토후쿠선東北線을 따라, 오오미야大宮나 아카바네赤羽에서 암미 거래를 했는데, 거기서는 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우츠노미야宇都宮에서 단속이 있었다. 쌀값이 오를 거야.

「후루카와古河에서 일제단속이다. 여기에는 쌀 한 톨도 들어오지 않게 될 걸.」

어른들의 이런 속닥거림에 귀를 기울이며 잽싸게 돈을 내고 쌀을 가방에 넣는 와중에 저는 거래의 요령을 익혔습니다.

책상 위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살아있는 공부였습니다.

그 당시의 경험이 후에 아이키도 도장을 경영하던 때에 크게 되살아났습니다.

거래란 무엇인가, 경영이란 무엇인가를, 저는 모르는 새에 배우고 있던 것입니다. 인생, 무엇이 힘이 될 지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