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시대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

드디어 사카모토 료마 연재의 대단원을 찍게 되었습니다. 그간 재미있게 읽으셨는지요? 필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5부를 연재한지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야 6부를 연재합니다. 혹여나 6부를 기다렸던 분이 계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살펴보았듯이 사카모토 료마는 큰 뜻을 가진 기린아였습니다. 어찌 보면 하라는 공부도 안 하고 부모님 속만 썩였던 철모르는 막내아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진면모는 가슴 속에는 눈앞의 현실을 넘어선 미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그릴 수 있는 넓은 시야와 큰 그릇을 가진 선각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사카모토 료마가 그의 큰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좀 더 깊이 살펴보려면, 그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을 이해하려면, 우선 당시 봉건 사회였던 일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봉건제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봉건제는 쉽게 말해서 중앙 집권자가 국가의 대표 내지는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지방 정치는 각 지방의 세력가들이 맡는 식의 정치체제를 의미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 때 지방 세력가란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것이 아닌, 그야말로 지방을 대대로 다스리는 영주이지요. 그리고 중앙정부는 이들로부터 세금을 걷고, 유사시에는 군사력을 징발하고, 지방 영주들이 혹여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고전 문학 작품인 『춘향전』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춘향전에서는 이몽룡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는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던 변학도가 결국에는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에게 봉고파직을 당합니다. 이런 광경은 조선 사회가 지극히 중앙집권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즉, 지방 수령이 아무리 권세를 부려 봐야 임금, 즉 중앙 정부가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하고 발령을 낸 관료일 뿐이기 때문에 임금의 대리인인 암행어사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일 뿐인 것이지요.

이런 모습은 봉건 사회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 하면 봉건 사회에서 지방 영주는 중앙 정부에 의해 임명되는게 아니라, 대대로 그 지방을 다스리는 사실상의 ‘작은 임금’이나 다름없는 신분이니까요. 물론 에도 막부는 봉건 사회의 수장 치고는 권력이 강한 편이어서 지방 영주, 즉 다이묘들을 1년은 영지, 1년은 에도에 번갈아 머무르도록 하는 산킨고타이(參勤交代) 제도를 실시하고 다이묘들의 직계가족을 에도에 인질로 잡아두는 등의 ‘길들이기’ 정책도 실시하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봉건사회 치고 막부의 권한이 강한 것이었지 조선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춘향전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일본의 봉건 사회였다면 나쁜 쪽은 변학도가 아니라 춘향이 아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지역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임금과 같은 다이묘의 수청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다이묘의 영민으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요.

이런 봉건 사회의 특징 덕택에, 료마는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발돋움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왜냐 하면 에도 시대 말기 일본이 봉건 사회였기 때문에 사쓰마번, 조슈번 같은 반막부 정서가 강했던 지역들이 반막부 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를 수 있었을 테니까요. 료마가 도사번주 야마우치 요도를 움직여 대정봉환을 실행에 옮긴 것 역시 봉건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 사회였던 조선왕조였다면 대번에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겠지요. 조선왕조의 생명력이 꺼져가던 1890년대에도 흔히 동학농민운동이라 불리기도 하는 갑오농민전쟁을 조선정부가 무자비하게 진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랫동안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해 왔던 조선왕조의 특징, 그리고 그러한 조선 사회의 특징이 맞물려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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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공원이 된 고치성에는 이 성을 축조한 에도시도 도사번 초대 번주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기마상이 서 있습니다. 봉건제 사회였던 중세 일본의 성은 지방의 유력 다이묘가 축조하여 대를 이어가며 가문의 거성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출처: 일본 고치현 고치성공원 웹사이트)

 

에도시대 일본이 쇄국정책을 강행했다고는 하나 조선과 달리 세계를 바라보는 최소한의 눈을 뜨고 있었던 점도, 사카모토 료마를 키웠던 중요한 배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에도시대 일본은 쇄국정책을 국정의 기조로 삼으면서도 화란(和蘭), 즉 네덜란드를 통해서 서구 세계와의 최소한의 교류를 유지해 왔습니다. 덕택에 일본 에도시대에는 난학(蘭学)이라 불렸던, 네덜란드를 통해 유입된 서양 학문의 연구도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외세의 급작스런 침입에도 일본이 어느정도는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었던 비결에는 이런 부분도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이자 그를 혈기만 믿고 날뛰던 철없는 젊은이에서 일본의 미래상을 제시할 지사로 바꾸어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한 가쓰 가이슈 같은 인물도, 이러한 시대상 덕택에 해군부교라는 관직을 역임하면서 료마의 성장,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라는 역사적 변혁의 밑거름을 깔아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공부 뿐만 아니라 무술 실력 역시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세태 또한 사카모토 료마의 성장에 좋은 밑거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전 원고에서 이야기했듯이 료마는 서당을 며칠 다니지도 못한채 뛰쳐나올 정도로 글공부에는 흥미도 소질도 없었던듯 합니다. 당시 세태가 글공부만을 중시했더라면 그는 문자 그대로 낙오자 신세로 전락했거나, 막부 말기에 정치깡패 노릇이나 하며 인생을 허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글공부 대신 검술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북진일도류 유학을 통해서 에도라는 보다 넓은 공간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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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조성된 인공섬 데지마(出島)는 에도시대 네덜란드와의 공식 무역 창구였습니다. 쇄국정책을 표방한 에도 막부였지만, 이처럼 제한된 창구를 통해서 해외와 최소한의 교류는 하였으며 이 덕분에 세계 정세의 흐름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나가사키시 공식 웹사이트)

이는 그의 견문과 안목을 키워줌은 물론, 훗날 그에게 정치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인맥 형성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에는 문제가 없는지, 우리의 교육이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거인을 죽이고만 있는 잘못된 교육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도 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사카모토 료마는 시대가 만든 영웅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카모토 료마가 단지 시대의 산물일 뿐이었다면, 그 당시 일본인들 모두가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인물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북진일도류 검술을 단지 무기를 쓰는 기술을 연마하는 수준을 넘어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거기서 더 높은 뜻을 실천하기 위한 밑바탕으로 삼을 수 있었던 도량, 한 칼에 쓰러뜨리려 했던 ‘역적’ 가쓰 가이슈를 오히려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겸손함, 대의를 위해서 한때는 자신을 탄압했고 자신의 동지들을 숙청하기까지 했던 번주 야마우치 요도를 설득할 수 있었던 설득력과 용기, 그리고 전쟁과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메이지 유신을 실현하고 일본의 미래를 설계하였던 마음이 있었기에, 사카모토 료마는 그저 한 시대를 극적으로 살다간 풍운아에 그치지 않고 일본인들, 아니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위인으로 거듭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내려 봅니다.

우리가 수련하는 아이키도를 상징하는 단어는 ‘화(和)’입니다. 사카모토 료마 또한 평화, 즉 화를 실천한 인물이었다고 감히 평가내려 봅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그랬듯이 우리도 단순히 무술을 수련하는 것을 넘어서, ‘화’의 수련을 실천해 봅시다.

이동민
대구교육대학교 졸업(200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교육학박사, 2014) 전) 대구교육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현)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초빙교수 한국교원대, 서울교대, 서울대, 공주대, 전남대 등 출강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한국번역가협회 정회원 주요 저역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역서, 2013, 논형)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공역, 2014, 푸른길) 『지리의 모든 것』 (역서, 2015, 푸른길) 주요 연구업적: How to design and present texts to cultivate balanced regional images in geography (Journal of Geography, 2013) Mindful learning in geography: Cultivating balanced attitudes toward regions (Journal of Geography, 2015) E-mai: dr.dongmin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