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표현하는 시의 무도

류성훈 작가(아이키도 2단)
류성훈 작가(아이키도 2단)

 

몸으로 표현하는 시(詩)의 무도(武道), 아이키도(合氣道)
– 대상과 주체의 실존적 조화 –

오래전부터 나는 혼자 별 특이하지도 않고 동시에 해결되지도 않을 공상을 계속 해왔고 어찌 보면 지금도 그런 공상 속에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일종의 강박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왜인지는 몰라도, 어려서부터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가치 있는 일을 찾고, 그것을 위해 평생 매진해 가고 싶다’는 욕심에 쫓겨 왔는데, 내게 한정적으로 주어진 시간을 좀 더 완성도 높은 사람이 되는 데 쓰고 싶다는 식의 사고방식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지극히 주관적 가치기준의 문제이므로 애초 정답도 없기야 하겠지만, 이런 고민들이 나만의 어떤 세계를 개진하고 죽는 일 따위엔 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는 대학 전공이 현대문학이고, 그중에서도 시(詩)다.

타고난 문인들이 대체로 그랬던 것과는 달리 나는 처음부터 문학이 인생의 지고한 목표였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어떤 거룩한 동기 같은 걸 가졌던 적도 없었다.

수능을 보았을 때 두 군데의 경제학 전공과 한 군데의 문학 전공에 합격했고, 세상이 지금과 같은 생계지옥이 될 줄은 전혀 몰랐던 어린 날의 나는 고등학생 때 관심 갖던 문학을 떠올렸다.

그러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성공한다는 철없는 논리만으로 ‘경제’가 아닌 ‘문학’을 선택했었다.

당시 문학을 좋아만 한 채 그게 뭔지도 몰랐던 나의 눈에, 일단 문학이란 ‘언어를 다루는 예술’이었고, 대학에서 맛본 문학 장르 중 가장 언어를 깊이 있는 차원에서 다루는 장르가 무엇인지 찾았던 내게 해답은 당연히 ‘시’였다.

나는 그 이유 하나로 지금의 이 길을 택했고, 한 번도 종목을 바꾸어본 적이 없다. 나는 그게 무엇이든 제일 높은 층위에 있는 것이 맞다 생각되면 꾸준히 믿고 무식하게 노력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좌절은 수없이 했지만 방황을 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다행히 훌륭한 선생님들과 선배들을 만났고, 그 덕에 지금까지 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찌 보면 정말이지 미련하고 재미없는 인생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지나치리만큼 신중한 시작을 통해 움직여온 내 강박적 선택은 (내가 보기엔) 다행히 틀린 적이 별로 없어서, 아직까진 그 강박을 믿고 살고 있다.

나는 문학을 통해, 문학을 모르거나 문학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조금 더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고 있다 여기면서, 그것에 감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약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의 권유로 태권도 도장에 다니다가 무도라는 것의 매력에 끌리게 되었던 나는, 앞집 뒷집 친구들도 다 배우는 ‘국민생활체육’에 가깝던 태권도보다 더 진보된 무도는 없을까에 대해 고민했었다.

결국 인간답게 ‘도구를 사용하는’ 무기술을 배우고 싶어 어린 마음과 호기심에 우슈 도장으로 옮겨봤다가 한 가지 무기를 제대로 깊이 있게 하는 방식이 더 좋아서 검도장으로 옮겼고, 미성년의 거의 모든 세월을 검도와 함께 보냈다.

그러다 검도의 역사와 원리와 이치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게 알게 되다 보니 일본의 고류무술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아가게 되었고, 그러다 그 고무도의 형태가 지금까지 제일 잘 남아 있는 동시에 검(劍) 없이 몸으로 검술을 풀어내는 무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스포츠화된 시합 중심의 ‘현대검도’보다 더 고차원적인 가치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해줄 것을 직감했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검도의 사유수준이 낮다는 뜻이 아니라, 추구하는 바가 전혀 다른 층위의 것이라는 의미다.)

그것 때문에 결국 그렇게 오래 다니던 검도를 깨끗하게 그만두고, 무도(武道)라는 것을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해 현재까지 수련하고 있는 무도가 있으니, 그것이 아이키도(合氣道)다.

이렇듯 내 취미 시작의 동기는 전공 선택의 동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현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 중 한 가지가 있다. 무도, 혹은 무술이라고 할 때 그 호반 무(武) 자의 본의가 ‘싸우는 기술’인 것으로 알고 있는 점이다.

상대와 맞서 싸우는 의미의 글자로는 쟁(爭) 자, 투(鬪)자 등 많이 있지만, 사실 이것들은 옛사람들에게 있어 무(武)의 의미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
무(武)자는 ‘창 과’(戈) 자 아래에 ‘그칠 지’(止) 자가 있는 모양인데, 옛 전쟁의 주된 무기는 창이었으므로, 이를 의역하면 ‘싸움을 그치게 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즉 옛사람들에게 ‘무’라는 것은 ‘싸우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싸움을 그치게 하거나 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뜻이었을 터다. 또한 이 글자를 ‘창을 나무에 기대어놓고 앉아 있는 무사의 모습’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되었든 싸움을 위한 의미는 전무하다.
그런데 최소한 내 눈에는, 현대에 무도 수련을 한다는 사람들과 무도를 수련시켜주는 도장(道場)들은 모두 학생들과 성인들에게 ‘싸우는’, 그리고 ‘상대방을 이기는’ 방법만 가르치고 있었고, 그들의 강해 보이는 인상과 허우대는 실제로 ‘이기는 일’에 굶주려 있는 듯만 보였다.

그것은 하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불행한 일일 테지만, 아마도 약함은 곧 패배라고 생각하는 불안하고 비정한 사회 분위기와 인식이 상기 현상을 부추기는 듯했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거의 모든 도장이 어떻게 예절과 인성 교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영업을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예절이고 인성이라는 걸까. 도장에 오자마자 이유도 모른 채 국기에 경례를 올리고 친구를 겨루기에서 이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걷어차는 그런 것이 과연 본질적인 전인교육일 수가 있을까. 또는 그런 것이 훗날 예의라는 것의 진의로 둔갑해버리진 않을까.

나는 늘 의문을 가졌다. 내가 보기엔 어디에도 ‘네가 살아야 또한 내가 산다’는 식의 상리공생적 평화주의 철학은 없었다.

당연히 최소한 그걸 공유하고 실천하려는 의지나 시도조차도 본 적이 없었다. 이는 모두 무(武)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 속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얕은 이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무도는 달랐다.

기의 조화를 이뤄내는 방법인 아이키도(AIKIDO: 일본의 합기도-역주)는 간디와 같은 시대를 산 일본의 우헤시바 모리헤이(Ueshiba Morihei)에 의해 개발된 영적 훈련 방법이자 군사적 단련 방법이다.

그는 모든 창조물과 자신이 하나임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적에 대한 연민과 비폭력주의를 토대로 효과적인 자기방어 방법을 만들어냈다.

간디가 연민, 용서, 사랑이라는 영적 이상을 대규모 정치 투쟁에 적용했던 반면 우헤시바는 그것을 소규모 개인적인 갈등에 적용했다.

우헤시바의 천재성은 일련의 실용적인 동작과 대련술을 개발함으로써 개개인이 비폭력을 생활화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 마이클 겔브, ‘위대한 생각의 발견'(추수밭, 2007.)

위 구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들의 생각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인문교양서의 일부분인데, 간디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목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간디를 비교하면서 아이키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 무도의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요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어 부득이 이 글에 옮긴다.

우리나라와 달리 그 태생과 역사, 창시자가 명확하고 그 전통을 중심로 내려오는 일본 무도의 특징대로, 아이키도는 우에시바 모리헤이(1883~1969)라는 창시자가 고류무술을 토대로 만든 현대무도이자 전 세계 사람들이 널리 수련하고 있는 대표적인 수런법이다.

세계대전 종군 등 많은 전쟁과 살육의 참상을 보아온 그는 옛 일본의 무사들이 수련했던 유술¡¤검술¡¤창술 등 고류무술의 원리와 그 극의와 그가 오래 수련했던 무술인 ‘다이토류(大東流)’ 유술을 바탕으로 검술의 동작을 통해 몸을 다루는 특이한 유술에 그의 평화주의적 사상을 접목시킨다.

이것은 상대를 제압하거나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무술과는 달리 새로운 인본주의적 패러다임이 되고, 결국 일반적인 무도라고 불리는 콘텐츠들과 확연하게 차이 나는 특성이 되었다.

아이키도는 현대무도인 동시에 옛 일본 고류무술의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무도이기도 한데, 재미있는 점은 상대로부터 나를 보호하되, 나를 해하려던 상대방 또한 다치지 않게 보호한다는 의식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너를 죽이고 내가 살아남는 것이 평화가 아니라, 상대의 전의를 잠재움으로써, ‘나와 당신이 더불어 사는 것이 곧 평화이다.’라고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무도는 전투용 기술로서의 무술만을 이해해왔던 일반인으로서의 내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일단 그 철학 자체가 평화사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인지, 몸의 움직임이 매우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리고 기술의 몸놀림과 이치는 교육 가능한 정해진 기술들로 되어 있으나, 사람마다 모두 체형과 힘과 중심이 다르므로 철저하게 오랜 수련을 통한 경험과 기민한 감각을 통해 상대의 기를 느끼고 합하는 수위를 끊임없이 높여가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고, 깊고, 또한 재미있다. 아테미(當身技)라고 해서 손으로 상대를 타격하는 매우 중요한 기술이 있으나, 기술의 원리와 완성도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련할 뿐, 그 자체를 상대를 제압하고 다치게 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진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래서 체력이나 근력이 강하지 못한 사람도 오래 수련할 수 있고, 수련 분위기도 매우 화기애애하고 편안하다. 여성이 배우기에 또한 더없이 좋은 무도이기도 하다.
아이키도가 평화를 지향한다고는 하지만, 그 기술이 위력적이지 않은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실로 잔인하리만큼 강력하다. 아이키도의 기본기술만으로도 상대에게 술기를 걸었을 때, 적의를 가지고 힘을 균형있게 실은 채 기술을 건다면 단번에 관절을 몇 개씩 부러뜨릴 수도 있고, 정확하고 깔끔하게 들어갈 수 있으면 거한도 쉽게 내동댕이쳐진다.

물론 세상에 말처럼 쉬운 것은 없는 만큼 그 기술에 깊이를 더해가기 위해 계속 반복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고, 다만 다치거나 아프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수련할 뿐이다.

평화란 충분한 강함과 위엄을 갖춘 후, 상호 존중이 이뤄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체술(體術)을 통해 보여준다.

내가 느낀 아이키도의 매력이자 가장 재미있는 점은, 무도(武道)와 사상(思想)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지점을 아이키도는 확고히 해준다.

일단 전투 기술에 기반하면서도 ‘싸움’을 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또한 평화적 ‘사상’을 표현은 하되, 철학이 아니라 수련법이다. 이 점은 중요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배우는 수많은 가치들은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매우 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법학과 학생들은 법을 전공하면서 사회정의에 대한 꿈을 품고 헌법과 상법, 형법 등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여 법조계에 나온다고 해도, 실제론 법이 얼마나 형편없고 무력하며, 모순투성이인지 크게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내가 대학에서 문학을 배울 때도 이와 다른 것은 없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문학사조를 배우고 기호학을 배우고 수사학을 배웠지만, 그게 문학을 위해 필요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진정 요구되는 것은 대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유의 깊이’였지, 복잡한 문학의 사조나 화려한 수사학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우는 것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태권도의 모든 이치와 극의가 들어 있다는 품새들, 즉 국기원 커리큘럼인 태극 1장~8장, 고려 금강 태백, 평원 십진, 천권, 지태, 한수, 일여 등 많은 기술과 형이 존재하고 이것을 열심히 외우고 수련하지만, 실제 시합 상황이나 실제 상황이 되면 이중 날렵하고 빠른 발차기 기술 이외엔 아무 기술도 쓰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이제까지 내가 부족하게나마 수련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 바론, 아이키도는 상대(대상)와 나(자아)의 관계 혹은 거리[마아이(間合), 혹은 간합이라고 한다.]를 중요시하며, 그 관계선상에 존재하는 ‘기’를 평화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조화[和]를 꾀하는 무도다. 그러니 상대와 내가 접촉은 하되, 모두가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소위 시쳇말로 ‘뜬구름 잡는’ 말장난 층위의 평화와 조화가 아니라, 철저히 개인적이고 실재적인 차원에서 대상과 자아의 진정한 조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노력을 통해 좀 더 직접적인 평화를 구현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아이키도를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현대무도로서 자리 잡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점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예술적이다.

우리가 흔히 정말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우와 저건 정말 예술이야!’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차원에서건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이키도는 동작과 몸의 움직임이 보기에도 아름답고, 인간의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균형 잡힌’ 모습으로 보인다.

그것을 혼자서 몸을 배배 꼬아가며 ‘이것은 훌륭한 것이다.’라고 강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의 상호관계와 힘의 이치를 통해 구현 가능케 하므로 설명이 필요 없이 그 조화가 더욱 진실할 수 있다. 또한 그런 몸놀림이 나오는 이유가 상기와 같이 철학적이고 평화적인 사상의 결과물로서 나왔다는 점은 놀라운 것이다.

나는 이 점이 엉뚱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문학과 큰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학문’의 차원과 ‘예술’의 차원의 경계선상에 있다.

문학은 현학도 미학도 아니며, 모종의 철학적 사유와 바탕이 토대가 되어야 그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예술 분야다.

인간의 깊고 고고한 사유를 위한 가치가 ‘철학’이라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상정하기 위한 가치는 ‘예술’이다.

문학이란 개념은 사실 그 둘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정신의 ‘깊은’ 사유나 그 너머의 세계를 대상을 통해 정련되고 아름다운 언어로서 확장하고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문학’이라면, 아이키도는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상대와의 조화를 통해 육체적인 차원에서 아름답고 합리적으로 형상화시켜 보여주는 무도라고 한대도 그리 지나친 미화의 잣대일 것 같지 않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개진의 시작점은 자아와 타자와-혹은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에서 이야기하듯, 우리는 대상(사물, 타자)과 자아의 실존적 거리를 좁힐 수 없다는 근본적인 결핍 속에서 살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 삶에선 싸움도, 대립도 끊임없이 일어나며 마찰도 빚어지고, 슬픔이나 분노, 내/외상적 결핍 등 모든 부정적 요인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육체를 가진 한정적인 존재인 이상 살아서 이상향의 세계를 볼 수는 없을 것은 자명하다. 쉽게 줄여 말하자면 철학은 이상향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고, 예술은 그곳에 가기 위한 끝없는 노력의 선상에 있는 가치다.

문학은 그 노력을 언어로 재현하며, 아이키도는 우리의 육체로써 재현한다. 그런 면에서 아이키도는 예술적인 무도이며, 문학과 같은 예술적 맥락으로서의 특성이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하나가 될 수 없는 상대와 나를 하나와 같이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화’다.

문학은 언어와 언어의 조화를 통해 그것을 꾀하고, 아이키도는 상대와 나의 조화를 통해 그것을 꾀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합일점이 있다.

인생에 있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은 중요하고 소중한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것을 일찍 몇 개나 찾는 행운을 누렸는데, 사실 이는 행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필연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문학과 아이키도에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결코 실존적으론 하나가 될 수 없는, 나와 대상의 유기적인 조화를 꾀하는 평화의 무도. 너와 내가 가장 하나에 가까운 모습으로 현상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또한 그를 통해 나와 상대 모두를 지키는 이 ‘예술적’인 가치를 담은 무도를 배우고 있기에, 나는 문학을 배우듯 늘 뿌듯하고 행복하다.

‘아름다움’의 정체는 언어와 언어의 조화, 주체와 대상의 조화, 자아와 타자의 조화 속에 숨어 있다고 믿는 나로선, 문학이나 예술 같은 걸 모르는 분들이라도 이 수련을 통해서 또한 아름다움의 가치도 찾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사견이지만, 우리 시인들 중에서도 나뿐 아니라 자신의 삶과 더불어 이걸 함께할 수 있는 분들이 많아진다면 그 또한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류성훈 작가: 2012<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인동네 39호, pp.280-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