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검술가, 무도가로서의 사카모토 료마

5부. 검술가, 무도가로서의 사카모토 료마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위인인 사카모토 료마, 그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그가 역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면, 아마도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삿초동맹을 주선하고 대정봉환을 성사시켜 메이지 유신이 성사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선중팔책을 작성하여 일본 신정부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일본사의 흐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사무라이 신분이기는 했지만 말단 무사에 불과했던지라 정계의 전면에 나서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번 지도부를 막후에서 설득하여 불가능해 보였던 삿초동맹, 대정봉환 등을 성사시킨 것을 보면, 그의 정치적 역량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라고 보아야 할듯 싶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정치인으로는 물론 경영인으로서의 능력과 감각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아무런 기반도 없는데다 오늘날로 치면 수배자 신분이기까지 했던 탈번 낭인이었던 그는 해운업체인 가메야마 조합(亀山社中), 가이엔타이(海援隊)를 설립, 운영하여 이를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을 성사시킨다는 큰 일을 이루어 냅니다. 가이엔타이는 료마 사후 미쓰비시 그룹의 일원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술의 측면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어떻게 비라보아야 할까요?

사실 사카모토 료마는 무술의 성립이나 발전에 특별한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만큼 그는 가토리신토류의 창시자로 알려진 이이자사 조이사이 이에나오(飯篠長威斉家直, 1387-1488)라든가

북진일도류의 창시자인 지바 슈사쿠(千葉周作, 1793-1856)와 같이 무술이나 무도 그 자체를 통해서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괴는다른 견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사카모토 료마가 북진일도류에서 목록을 받기는 했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나기나타 목록이지 검술 목록이 아니었다는 근거로 그의 무술 실력을 폄하하기도 하는듯 합니다.

심지어 몇몇 지인들로부터는 그가 데라다야 사건에서 수십명의 암살자들로부터 ‘도망’을 친데다 마지막에는 암살자의 손에 쓰러졌다는 사실을 들면서 ‘검객이었다면서 싸움도 잘 못한 것 아니냐’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무술, 검술과 완전히 분리시켜 이해하는 것도 타당하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를 검술 실력이 뛰어나지 못했던, 심지어는 ‘싸움도 잘 못했던’ 인물로 폄하하는 것은 더더욱 적절한 펑가라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 하면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은 검술이나 무술이 아닌 정치 활동을 통해 역사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의 성장과 정체성은 엄연히 검술, 무술에 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1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어린 시절의 사카모토 료마는 서당 글공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료마가 단지 서당 글공부에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이지 그가 머리가 나빴다가나 지적 능력이 부족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서당에는 적응하지 못했는지 며칠 다니지도 못한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 그가 서당 대신 택한 곳이 바로 검술 도장이었습니다.

서당에는 적응하지 못했지만 검술은 적성이 맞았는지, 그는 도사번 내에서도 검술의 유망주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는 사카모토 료마가 검술을 배우며 자랐다는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사카모토 료마가 정치, 경영 등 일견 검술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아 보이는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그는 검술 연마를 하는 가운데 성장기를 보낸 인물, 즉 검술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에 깔고 자라난 인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사카모토 료마는 검술이나 무술의 형성, 발전이 아닌 정치적인 분야에서 활약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정체성과 뿌리는 검술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검술가로서의 정체성과 뿌리는 사카모토 료마의 개인사에 국한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도사 근왕당을 지휘하여 한때나마 도사 번정을 장악했던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 1829-1865) 같은 인물도 바로 검술을 연마하면서 알게 된 동지들이었지요.

 

다케치 즈이잔(출처: Marius B. Jansen, 손일‧이동민 역, 2014,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푸른길).
다케치 즈이잔(출처: Marius B. Jansen, 손일‧이동민 역, 2014,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푸른길).

사카모토 료마가 정치와 시국에 눈을 뜬 것도, 다케치 즈이잔과 같이 고향인 도사번에서 동문수학하며 함께 검술을 익힌 동지들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과 어울려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걸고 어설프게나마 정치 활동에 참여한 것은, 훗날 그가 이룩해낼 삿초동맹의 체결, 대정봉환의 성사와 같은 위대한 업적들의 출발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 시코쿠 남부에 위치한데다 산악 지형으로 구성된 촌락 지역이었던 도사번 출신의 이 젊은이가 일본사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에는,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로의 검술 유학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여행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어 번을 떠나려면 번주의 승인을 받아야 했던만큼, 에도로의 검술 유학은 오늘날로 치면 해외 유학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는 문하생만 천 명을 넘어가는 등 당시 일본에서도 일류 검술로 인정받고 있었으니,

오늘날로 치면 북진일도류 문하생이 된다는 일은 아이비리그의 세계적인 명문 대학에 입학한 것과도 같은 일로 보아도 무리는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그만큼 료마의 검술 실력이 번 내에서도 인정받을 정도였다고 볼 수 있겠지요.

남아 있는 자료가 충분치 않아 그가 북진일도류 내부에서 정확히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현존하는 북진일도류 병법 목록이 검이 아니라 나기나타라 하더라도 목록으로 인정받을 정도라면 적어도 북진일도류 내부에서도 상당한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북진일도류가 가져다준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면, 검술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느냐의 문제보다도 북진일도류를 통해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 덕에 당시에도 시골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지역인 도사 출신 청년의 한계를 넘어 일본사, 아니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었던 거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필자는 사카모토 료마가 가쓰 가이슈의 암살범으로 전락하는 대신 그를 도와 해군조련소 건설이라는 이상에 동참한 지사로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에는, 이 같은 검술 수련을 통한 경험과 배움이 분명히 있지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이키도를 수련중인 독자 여러분이라면, 수련을 하면서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보신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진 미야모토 무사시의 초인적이고 전설적인 검술 실력과는 달리 사카모토 료마는 딱히 화려한 검술 실력을 뽐낸 일화는 없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데라다야 사건에서 ‘도망’친 일화 때문에 그가 ‘싸움도 못 하는 검객’이 아니었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까요.

물론 현실에서는 중무장을 한 수십명의 자객과 맞서 싸우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한 채 자리를 빠져 나온것도 대단하다고도 변호 아닌 변호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수많은 일화들이 사실은 본인과 후대 작가, 매체들의 윤색과 미화의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검술, 무술의 방향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평생동안 수십명의 검술 고수들과 싸워서 패한 적이 엎다고 한들, 그것이 후세에게 재미난 무용담 이상의 의미를 과연 줄 수 있을까요?

당장 백과사전만 넘겨 보더라도, 그는 무사가 아닌 화가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카모토 료마는 단순히 검술을 통해 누군가를 이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검술을 연마하며 자라난 그는 검술을 연마해 가며 더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 경험과 배움은 결국 한 사람의 강자를 쓰러뜨리는 검술을 넘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검술로 승화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아이키도 수련 시간이나 강습회를 통해, ‘미야모토 무사시가 아닌 사카모토 료마의 무술을 배우라’라는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 보았으리라 믿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사에 중요한 영향을 준 정치가이지만, 무술을 수련할 때에는 ‘무인 사카모토 료마’를 떠올려 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믿어 봅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수련했던 북진일도류 검술은 현대 검도의 원류로 평가받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일본 도쿄에 소재한 현무관(玄武館)에서 대를 이어 가며 지도하고 있습니다. 북진일도류는 오승도장과의 제휴 하에 한국지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북진일도류 현무관 웹사이트)
사카모토 료마가 수련했던 북진일도류 검술은 현대 검도의 원류로 평가받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일본 도쿄에 소재한 현무관(玄武館)에서 대를 이어 가며 지도하고 있습니다. 북진일도류는 오승도장과의 제휴 하에 한국지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북진일도류 현무관 웹사이트)
대구교육대학교 졸업(200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교육학박사, 2014) 전) 대구교육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현)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초빙교수 한국교원대, 서울교대, 서울대, 공주대, 전남대 등 출강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한국번역가협회 정회원 주요 저역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역서, 2013, 논형)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공역, 2014, 푸른길) 『지리의 모든 것』 (역서, 2015, 푸른길) 주요 연구업적: How to design and present texts to cultivate balanced regional images in geography (Journal of Geography, 2013) Mindful learning in geography: Cultivating balanced attitudes toward regions (Journal of Geography, 2015) E-mai: dr.dongmin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