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3] 꿈과 평화의 상징, 사카모토 료마

출처: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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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평화의 상징, 사카모토 료마

 

 

지난 연재분까지 모두 3회에 걸쳐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를 살펴 보았습니다.

즐겁고 유익한 연재였는지요? 1-3부까지의 연재 내용을 되살려 보면,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면서도 꽤나 흥미로운 삶을 살다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인물은 마치 감당하기 어려운 탕아같은 청소년기를 보내다 가쓰 가이슈라는 스승 덕택에 삶의 방향이 180도 바뀌어 버리는 대반전을 겪고,

서로 전투까지 벌일 정도로 앙숙이었던 사쓰마, 조슈 두 번을 화해시키는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일을 극적으로 성사시켰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대정봉환을 성사시켜 메이지 유신이 실현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발전해 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으니까요.

서당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있는 집 놈팽이’가 이처럼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꾸어 놓은 큰 인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극적인 재미는 물론, 오늘날을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정봉환 직후에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 점은 그 같은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에 안타까움을 더해 주어, 료마의 영웅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늘은 이 젊은이를 일본을 위해 내려주었고, 그의 소임이 끝나자마자 하늘로 되돌리고 말았다’라는 일본의 문호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의 탄식도 이러한 견지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사카모토 료마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정한 메시지는, 단순히 그가 ‘탕아에서 시대를 바꾼 영웅으로’ 거듭난 극적인 성장기나 출세기, 또는 극적이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최후를 넘어선 곳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역사를, 아니 우리 주변을 조금만 살펴 보더라도 료마가 성장한 것처럼 극적인 성장을 하거나 또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무기 설화가 말해 주듯이 큰 일을 하다가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들 또한 사카모토 료마 말고도 적지 않지요.

사카모토 료마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을 넘어 오늘날 일본인들의 롤모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까닭,

그리고 일본인이 아닌 우리 또한 그를 읽고 배우고 본받을 가치가 있는 까닭은, 바로 그가 전쟁이나 유혈이 아닌 평화를 통해 메이지 유신을 이룩하려 했고 또 그러한 노력이 상당 부분 빛을 본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연재분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은 에도 막부와의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번은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경제력, 정치적 영향력,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에도 막부 입장에서는 태생적인 반골이라 할 만한 이들이었지요.

더군다나 사쓰마번의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일본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호전성이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일본에서도 남서쪽 끝의 변두리에 위치한데다 화산 지대인지라 농사짓기가 곤란했던 탓에 일찍이 밀무역과 교역 등으로 생계를 꾸려간 그들의 분위기는 자연히 거칠고 호전적이었지요.

지겐류(示現流)라는 목숨을 건 일격을 중시하는 검술을 연마한 사쓰마 사무라이들은 일본 최강의 무사, 군인, 싸움꾼으로 명성이 자자했었지요.

에도 막부 역시 이들에게 순순히 정권을 넘겨줄 의향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조슈, 사쓰마 두 번의 원한과 앙숙 관계는, 이들이 동맹을 맺기 수년전 막부에 대해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던 조슈번을 에도 막부가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쓰마가 막부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지요.

에도 막부는 게다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번들을 감시하고 이들을 견제하는 일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소설,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대중 매체 덕택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신센구미(新選組)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지요.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검술에 뛰어난 자들을 끌어모아 조직된 신센구미는 에도 막부에 반대하는 유신 지사 및 반체제 인사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고,

그 탓에 에도 시대 말기에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가 메이지 유신이 끝난 뒤에는 결국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처벌받고 숙청당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에도 막부의 평화적인 퇴진을 통해 ‘피를 흘리지 않는’, 또는 ‘유혈을 최소화하는’ 유신을 이루어 낸다는 과업은 어쩌면 사쓰마, 조슈 두 번을 화해시켜 동맹을 맺도록 하는 일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사실상 실현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왕조나 정권, 체제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에는 끔찍할 정도의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일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카모토 료마는 자신의 고향인 도사번 번주의 도움을 받아, 대정봉환이라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일을 성사시켜 냅니다.

물론 대정봉환이 이루어진 직후 일본에서는 보신전쟁(戊辰戰爭)이라 불리는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 전쟁은 일본 열도 전역을 휩쓰는 대규모 전쟁, 총력전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국지전이 이어진 정도로 마무리됩니다-물론 보신전쟁이 전쟁이라 불리기도 애매할 정도로 피해가 미미했다거나, 그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가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더욱이 사카모토 료마는 단지 메이지 유신과 관련된 세력간의 갈등을 무마하는데 그치지 않고, 선중팔책이라는 새 시대의 강령을 제시하기까지 합니다.

단지 정쟁에서 기득권을 얻는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밑그림을 제시했다는 점은, 사카모토 료마가 단지 수완좋은 협상가 또는 정치가에 그친 인물이 아니라 새 시대를 내다보고 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인들에게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위인으로 재조명받을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바 료타로의 대하소설 『료마가 간다』가 1960년대 신문에 연재되면서부터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기 일신의 영달과 평안아 아닌, 세상을 위해 행동하고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물론 이러한 명분이야 료마 말고도 많은 사람이 내걸기는 하지만, 그는 이 같은 명분을 정치적 야심이나 세력 확대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위해 썼다는 점에서 역사를 살아간 다른 인물과는 차별화된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급격한 근대화에 성공하여 선진국,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에는, 이처럼 평화를 갈망하고 이를 실천한 료마 덕택에 메이지 유신 직후의 일본이 내전과 같은 극도로 소모적이고 혼란스러운 사태를 최소화하고 근대화와 부국 강병을 위한 노력에 집중할 수 있었던 까닭도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가 그토록 존경받을 수 있었던 비결, 그리고 우리 역시 그를 읽고 그를 본받아야 할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늘로 돌아간지도 15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의 동아시아 정세를 살펴보면, 그가 세상에 던져준 꿈과 평화의 메시지는 메이지 유신 뿐만 아니라 오늘날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정세에 있어서도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실천되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함께 해 봅니다.

대구교육대학교 졸업(200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교육학박사, 2014) 전) 대구교육대학교 박사후연구원 현)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초빙교수 한국교원대, 서울교대, 서울대, 공주대, 전남대 등 출강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한국번역가협회 정회원 주요 저역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역서, 2013, 논형)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공역, 2014, 푸른길) 『지리의 모든 것』 (역서, 2015, 푸른길) 주요 연구업적: How to design and present texts to cultivate balanced regional images in geography (Journal of Geography, 2013) Mindful learning in geography: Cultivating balanced attitudes toward regions (Journal of Geography, 2015) E-mai: dr.dongmin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