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무도의 철학적 기반(2)

2. 심리적 안정(平常心)

무도에서 내공이 쌓인다는 것은 숙련된 기술습득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심리적으로 안정이 돼 있다는 뜻이다.

수련의 과정을 통해서 쌓인 내공은 외형상 부드럽고 이완된 동작들이 되어 상대에게 커다란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공부를 통해 상대의 에너지를 깊이 있고 통찰력 있게 이용하며, 그 에너지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항상 흐르게 할 수 있다.

내가권에서‘意는 氣를 이끈다’는 원리처럼 나를 향한 상대의 에너지는 그 에너지(氣)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의 뜻(意)을 수반하여 발출되는 것이다.

이때 상대편의 에너지를 내가 공격당하는 범위 바깥으로 흘린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상대의 意를 그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때 상대의 몸에는 순간적인 意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공격해 오는 주먹으로 형상화된 에너지(氣)가 아니라 그 에너지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인 意의 거처를 파악하고 그 최초의 일어남을 포착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意의 미세한 움직임을 찾아낼 수 있으며,

순간적인 공격에 나도 모르게 상대의 에너지를 느끼고 반응하여 방어를 하고 동시에 공격을 할 수 있게 되는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감각’이며,

나도 모르게 반응하는 것은 ‘반사신경’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단순히 육체적인 반응에만 근거하지 않으며, 심리적 平常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中庸』 1章에서는 인간의 감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情이 發하지 않은 것을 中이라 이르고, 發하여 모두 節度에 맞는 것을 和라고 이르니, 中이란 것은 天下의 큰 근본이요 和란 것은 天下의 공통된 道이다.

 

무도를 수련하는 자는 마땅히 喜怒哀樂이 發하지 않은 未發의 상태를 유지하여한다.

이것은 마음이 편벽되고 치우친 바가 없는 ‘中’의 상태이다.

내 스스로가 그대로 고요하고 맑아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虛靈不眛’한 심리적 평정상태에서 우리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고 에너지는 더 깊이 가라앉게 된다.

선사 마조(馬祖, 709∼788)는 ‘平常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바로 道에 대해 알려고 하는가? 평상의 마음이 道이다.

평상심이란 造作이 없고, 是非가 없으며, 取捨가 없고, 斷常이 없으며, 凡聖이 없다. ․․․ 다만 지금과 같이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앉고 눕는 동작과 어떤 상황에 대처하고 사물에 접촉하는 행위가 모두 道이다.

평상심이란 어느 한 쪽에 집착하지 않고 ‘中道’를 지키는 마음인데,

이러한 평상심은 상대를 意氣를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의 의도를 상대에게 드러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무도에서 상대가 나의 에너지를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가 상대의 에너지를 감지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이것은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그 파동이 바로 드러나지만, 파도가 요동치는 수면에 던진 돌은 이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맹자는 수양론으로 ‘求放心’의 공부법을 말했는데, 이것은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性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말로서 흩어진 마음을 수렴하고 天理를 보전 하라는 것이다.

맹자의 말처럼 무도를 닦는 사람에게 存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늘 평상심을 유지하여 상대의 예측할 수 없는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대처하며 공격 후에도 마음을 놓지 말고 정신을 집중해서 상대의 다음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도는 부단한 훈련을 통해 스스로의 심리를 통제함으로써 감각의 미세한 변화까지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학의 수양론에서는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여’(戒愼恐懼) 늘 ‘敬’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고요한 몸과 마음은 무도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조건인 것이다

 

– 본 내용은 김용훈 ( Yong-hoon Kim ) (움직임의철학 : 한국체육철학회지, Vol.24 No.2, [2016])[KCI등재] 의 일부 내용입니다 –

 

 

 

 

*공부법(工夫法)

 

조선시대 천재 성리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율곡(栗谷 李珥, 1536~1584) 선생께서는 격몽요결(擊蒙要訣) 서문 첫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이 아니고서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른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에서 벗어나거나 (일상생활과 벗어나) 별도로 존재하는 일이 아니다.”
(人生斯世, 非學問, 無以爲人, 所謂學問者 亦非異常別件物事也.)

즉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논어의 맨 처음도 공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공자: 출처 구글이미지
공자: 출처 구글이미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論語』「學而」1章 :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悅)乎.)

 

도대체 공자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부는 무엇이기에 공부하는 것이 이렇게 즐겁고 재미있다고 하였는가? 과연 그 공부란 무엇인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공부란 기질변화(氣質變化)의 공부를 말한다. 동양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심리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보다 감정이다.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통해 기질을 변화시키려면 수양(修養)공부는 반드시 필요하다.

유가의 대표 경전인 논어, 맹자, 대학, 중용도 전부 수양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학문은 주로 서양의 학문과 시스템으로서 지식 쌓기에 중점을 둔다. 그 지식이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지식이다. 즉 욕심 채우기 공부이다. 동양에서의 학문은 욕심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전하여 진리(가치)를 추구하는 공부이다.(存天理 去人欲)
이것은 모두 공부를 자기반성의 기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불,도 삼교(三敎)의 공통적인 문제는 心이다.
유가의 정좌(靜坐)공부나 불가의 지관(止觀)공부, 도가의 내단(內丹)공부 모두 사욕(私欲)을 제거하고 고요함과 정신이 청명한 가운데 깊은 내면의 본질로 들어가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핵심은 정신통일 공부이다. 공부가 깊어져서 정신을 깊이 몰입하면 굉장히 높은 경지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양공부에도 순서가 있다.

논어에 보면 공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仁한 사람을 친근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그때) 학문을 해야 한다.”(『論語』「學而」6章 :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공부하기 전에 먼저 기본적인 인간관계와 자신의 직분 및 행실을 충실히 한 연후에 학문에 몰입하라는 이야기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 특히 부모, 형제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를 닦아 봤자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공부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옛날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 (공부)하였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하여 (공부) 한다.”(『論語』「憲問」 :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진정한 공부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하여 하는 학문을 말하며, 요즘의 스펙 쌓기식 공부는 남에게 인정받고 남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하는 학문으로서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위기지학을 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얼마나 순수하냐가 중요하다.

유학의 이런 높은 정신의 경지는 어떤 심오한 철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공부에 관한 학이(學而)편 마지막에 공자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으신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論語』「學而」 16章 :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진정한 위기지학공부는 남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양공부기 때문에 남이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옛 성현들께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 문제로 들어가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했던 것이다.

 

요즘은 웰빙(참살이)이라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요가나 혹은 단전호흡(명상) 등 몸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몸이 기초가 된다.

몸을 초월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다.

인간이 몸을 쓰면서 산다는 것은 어떤 유기적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가? 를 고민해 본다면 주역에서는 “가깝게는 자기 몸에서 진리를 찾고 멀게는 각각의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周易』「繫辭上」: 近取諸身 遠取諸物)라고 했다.

그러므로 靜(마음)공부를 하려면 먼저 動(몸)공부부터 해야 한다.
내 몸은 무엇인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를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키도(合氣道, Aikido)는 몸의 공부를 통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좋은 운동 중 하나이다.

도장에서 같이 수련하는 도우(道友)들과 집중해서 손을 맞대며 수련을 하다 보면 어느새 몰입이 잘 된다.

상대방을 이길 필요도 없다.

오직 나와의 싸움이다.

때문에 본부도장의 오승(吾勝)이라는 이름은 아이키도 공부법에 잘 맞는 이름이다.

그것은 유학의 극기복례(克己復禮)와도 일백상통 한다.

공격적인 무술만 접한 범인(凡人)들은 아이키도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나를 이기고 상대방마저도 보호한다는 아이키도의 정신 안에는 깊은 자기성찰과 평상심을 기반으로 한다.

창시자의 철학이 깊이 베여있는 만유애호(萬有愛護)의 아이키도 공부론(工夫論)은 단수가 매우 높다.

공격해오는 상대마저 베려한다는 정신은 웬만한 내공이 아니고서는 힘든 도통의 경지이다.

아이키도 공부를 통해 자신은 물론 남도 잘 되게 한다면 진정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될 것이다.

 

“어진자는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신이 통달하고자 하면 남도 통달하게 한다.”(『論語』「雍也」 28章 :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